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轉法輪 (전법륜) [제 2 권]

 

李 洪 志

 

따위산(大嶼山) 설법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때 수련 성취하지 못했고, 또 내세(下世)에 다시 수련하려는 소원도 없다면, 내세에는 속인으로 태어나게 되고, 다시 수련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전일세(前一世)에 수련해 온 것들은 곧 복(福份)으로 변할 수 있는데, 많은 고관들이 다 화상(和尙)이 전세(轉世)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고생스럽게 수련하여 얼마간의 복을 쌓았는데, 수련 성취하지 못하게 되자 높은 관리가 되거나 황제가 된 것이다.

만약 이번 생에 수련 성취하지 못했지만 다음 생에는 꼭 다시 수련하겠다는 뜻을 품는다면 내생에 인연을 맺을 수 있다. 아마 내생에도 이 법문 중에서 이어서 수련할 수 있을 텐데 그러면 또 이 수련의 인연을 촉성(促成)할 수 있다. 만약 이런 뜻을 품는다면 이 사람은 전생(轉生) 후 지하의 낮은 신(神)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그의 사부가 그를 관장하는데, 그가 전생하는 것을 따라다니면서 지켜보다 어느 집에 전생하면 그가 수련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수련할 수 있는 이런 기회를 얻게 된다.

일부 절의 많은 화상(和尙)들이 수련 성취하지 못한다. 수련 성취하지 못함은 주로 많은 집착심을 버리지 못하고,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를 모르며, 법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경(經)을 외우기만 하면 곧 부처로 수련되는 줄로 여기지만, 속인의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면 그는 수련 성취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또 한마음으로 부처를 향하므로, 죽은 후에도 역시 절에서 돌고 돌며 또 따라서 수련하는데, 바로 이런 식이다. 그것을 귀신이라고 하자니 귀신이 아니고, 화상이라고 하자니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인류는 현재 비교적 난잡해졌다. 또 어떤 불상에는 부처가 없는데, 일부 가짜 부처는 사람이 빌어서 생긴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은 나무에 빨간 천 조각을 매어놓고도 절을 하고, 산을 향해서도 절을 하며, 돌을 향해서도 절을 하고, 개광하지 않은 조각한 불상에도 절을 하여 일부 가짜 부처를 불러온다. 생김새가 부처와 같지만 가짜로서 부처의 형상을 갖고 나쁜 일을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부류가 아주 많다.

천상에서는 정과(正果)를 얻는 데 대한 요구가 매우 엄하여 사람이 상상하는 것과 같지 않다. 사실 불교는 근대에 이른 후 쓸모가 없어졌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두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 몰라 수련하기가 아주 어려워졌다. 불교 중에는 불경에 대한 해석이 아주 많아 이 화상(和尙)은 이렇게 해석하고 저 화상은 저렇게 해석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사람을 갈림길로 이끌어 들일 수 있는바, 모두 불법을 파괴하는 것이다. 사람은 오직 불경의 원래 글자, 원래 뜻에 따라 깨달아야만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으며, 작은 이치라도 깨달았다면 그는 바로 제고된 것이다. 다시 보면 또 한 가지 이치를 알게 되는데, 그는 또 제고된 것이다. 부동(不同)한 층차에서 그는 부동한 인식이 있을 수 있다. 일부 화상은 불경에 정의(定義)를 내리고 또 어떤 사람은 책을 써서 불법을 해석하며 정의를 내리는데, “부처님이 말한 이 한 마디는 이런 뜻이고 저 말은 바로 저런 뜻이며…… 이 뜻이며…… 그 뜻이다.”라고 한다. 본래 부처가 이야기한 한 마디 말은 줄곧 여래(如來) 그 경지까지 부동(不同)한 층차에 부동한 함의가 있다. 그러나 그 화상은 수련한 것도 매우 낮아 보살·부처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고, 그가 불경에 내린 정의는 사실상 그의 경지 중의 인식으로서, 그의 말은 더욱 높은 내포가 없고, 사람을 하나의 아주 낮은 인식으로 이끌어 그 속에 빠지게 한다. 실제 한순간에 사람을 삿된 길(邪路)로 이끌어 가게 된다. 그가 부처의 말은 바로 이런 뜻이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을 모두 그 안에 국한시키게 된다. 이런 인식으로는 누구도 수련하여 올라가지 못한다.

역대로 이런 해석이 특별히 많았다. 사실 사람들이 대장경(大藏經)을 말하고, 삼장(三藏)을 말하지만, 경(經)·율(律)·논(論) 삼장에서 경을 제외한 율(律)과 논(論)은 모두 경(經)과 함께 논할 수 없다. 더욱이 그러한 논(論)은 불법에 대해 제멋대로 논하여 불법의 원래 뜻을 모두 사라지게 만들었다. 지금의 화상은 현대 중국어로 불경을 해석하는데, 해석이 제대로 될 수 없다. 석가모니부처가 말한 원뜻이 어떤 것이면 바로 그런 것으로, 해석만 하면 곧 비뚤어진다. 이것이 지금의 화상이 수련 성취하기 아주 어려운 한 가지 원인이다. 화상은 이런 정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불경 원문을 보는데, 모두 고대어법이라 알아보지 못하여 참고서를 찾는다. 이런 참고서적은 모두 자신의 고만한 이해에 근거하여 제멋대로 해석한 것이다. 역대로 늘 이런 문제가 존재했다. 고대 역시 마찬가지로 고대에 쓴 책이라 하여 전부 믿지 말라. 모두 같은 것으로 사실상 모두 불법을 파괴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는 그의 법(法)이 얼마만한 해(年) 이후에는 곧 안 되며 말법시기에 이르러서는 마(魔)가 법(法)을 난잡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그 원인 중의 하나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된 것은 바로 화상이 함부로 하여 그가 이렇게 인식하고 저렇게 인식하며 제멋대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인식하고 인식해도 모두 석가모니부처의 원래 인식이 아니었으며 원뜻이 없어졌기 때문에 불교는 인도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함께 체득을 담론함은 문제가 없으며 당신이 불경에 대한 자신의 체득과 인식을 담론하는 이것은 괜찮다. 이는 어떠한 지장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말로 불경 중의 말에 정의(定義)를 내릴까 봐 염려된다. 매 한 마디 말이 모두 그 한 층차 중의 인식뿐만이 아닌바, 당신이 하나의 이치를 보고 말한 것이 정말로 맞고 좋다 해도 당신이 더 승화하고 더 제고하여 올라가면 당신은 같은 한 마디 말 속에 더욱 높은 이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는 49년 동안 법을 전했다. 처음에는 아직 여래(如來)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말한 법 중 일부는 여러해 전에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말했는데 그가 만년(晩年)에 이르러 열반(涅槃)할 때 말한 것과 앞에서 한 말은 차이가 아주 컸다. 왜냐하면 그 역시 끊임없이 인식하고 끊임없이 제고하며 끊임없이 수련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사람들에게 우주의 이치와 법(法)을 남기지 않았으나 현대인들은 그것을 법(法)이라고 일컬으며 경서(經書)라고 한다. 석가모니부처가 세상에 있을 때는 경서가 없었다. 후세인들이 석가모니부처가 한 말에 근거하여 회억(回憶)한 것을 정리할 때 그 속에는 오류가 있었다. 석가모니부처가 말한 진정한 함의도 어떤 것에는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그때의 인류는 이런 정도만 알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며 모두 필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누구도 감히 명백하게 수련의 것을 똑똑히 써서 사람들에게 남겨줄 수 없었는바, 무엇이든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미혹 중에 있어 아무것도 모르기에 깨닫기가 아주 어렵다.

석가모니부처가 세상에 있을 때 사람들에게 남긴 것은 주로 계율이었다. 최후에 석가모니부처가 열반(涅槃)할 때 그의 제자가 석가모니부처에게, “사존(師尊)께서 돌아가신 후 저희는 누구를 스승으로 모셔야 합니까?”라고 묻자, 석가모니부처는,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以戒爲師).”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수련자가 원만(圓滿)할 수 있는 계율(戒條)을 남겼다. 그것은 그가 살아생전에 규정한 것인데 후세 사람들은 그가 한 말에 근거하여 일부를 써내어 경(經)으로 삼았다. 나는 처음으로 진정한 수련의 것을 사람들에게 남겨주는바, 이것은 종래로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앞사람이 종래 하지 않았던 일을 했으며 사람들에게 하늘로 올라가는 한 부의 ‘사다리’를 남겨 주었다.

사실 종교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즉 하나는 진정으로 수련하여 올라갈 수 있는 괜찮은 사람들이 도(道)를 얻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 사회의 도덕을 비교적 높은 수준에서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종교가 해야 할 두 가지 일이다. 사실 내가 전하는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법(法)을 전하고 사람을 제도하기에 마찬가지로 이런 한 가지 작용을 한다. 즉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도(道)를 얻어 수련하게 하는 이런 한 갈래 길을 열어 준다. 또한 설법을 듣거나 책을 본 많은 사람들이 비록 수련하고자 하지는 않더라도 그는 하나의 이치를 알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좋지 못한 일이라든가 나쁜 일을 하지 않을 것인바 그는 마찬가지로 인류의 도덕수준이 비교적 높은 상태에서 유지될 수 있게 하는 이러한 작용을 한다. 진정으로 공(功)을 전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사람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전(史前) 어떤 때에 인류 문명은 비교적 긴 시간을 유지했고 어떤 때에는 비교적 짧았으며 어떤 인류 문명은 상당히 길게 유지했다. 매 시기 인류가 발전해 나간 과학의 길은 모두 같지 않았다. 지금의 사람은 현대과학의 발전 틀 속에 서 있기에 그는 또 다른 과학 노선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실질상 중국 고대의 과학과 지금 유럽에서 전해 온 과학은 현저히 다르다. 중국 고대의 과학은 인체·생명·우주에 대해 직접적인 연구를 했다.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을 고대인은 감히 접촉했으며 그것들의 존재를 실증할 수 있었다. 사람이 다리를 틀고 연공을 하노라면 감각이 승화되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는데, 최후에는 감각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그것을 감촉하게 될 뿐만 아니라 볼 수도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무형(無形)의 것을 유형(有形) 중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고대인은 생명의 오묘한 비밀(奧秘), 인체와 우주의 관계를 탐구하는 다른 한 갈래 길을 걸었는바 지금의 실증과학이 걷는 길과는 현저히 다르다.

사실 달은 바로 이번 역사 시기 이전(史前)의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서 그것은 속이 텅 비어 있다. 사전(史前) 인류는 아주 발달해 있었다. 지금의 사람들은, 피라미드는 이집트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 돌들을 어디서 운반해 왔는가를 연구하고 있는데, 전혀 그런 일이 아니다. 피라미드는 사실상 일종의 사전문화(史前文化)로서 바다 밑으로 침적해 내려간 것이다. 후에 지구가 변화하여 여러 차례 대륙판이 바뀜에 따라 그것은 또 올라오게 되었다. 나중에 이 지역에 새로운 주민들이 퍼져 나가게 되었으며, 그 속에 장기간 물건을 보존할 수 있다는 그것의 효능을 점차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사람의 시신을 그 속으로 옮겨갔다. 피라미드는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며 이집트 사람들이 그것을 발견하고 이용한 것이다. 나중에 이집트 사람들도 일부 작은 피라미드를 모방하여 만들었기에 과학자들이 똑똑히 밝혀내지 못했다.

현재의 인류는 단지 현재의 인식으로 문제를 보며, 더욱이 많은 과학자들이 내린 많은 정의(定義)는 사람을 완전히 틀 속에 가두어 놓는다. 다윈이 사람은 원숭이에서 변해온 것이라고 하자 사람들은 모두 사람이 원숭이에서 변해온 것이라고 믿는다. 결과적으로 이 이론에 근거하여 이렇게 추리하고 저렇게 추리한다. 현대 과학이 발견한 일부 것들은 우리 현대 인류의 문명역사를 훨씬 초월했지만 이것을 모두 인정하지 않고 모두 불가사의한 것으로 여기면서 제멋대로 추측하여 설명한다. 장래에 인체과학이 출현하게 될 것이다. 아마 장래의 물리, 화학, 기타 방면의 학과는 다른 각도에서 발전할 것이며 완전히 서방의 이런 각도에는 서지 않을 것이다. 현재 실증과학이 내린 정의(定義)는 매우 좁아서, 현재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만 인정하고,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것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실증과학의 과학에 대한 정의는 전혀 과학적이지 못해 완전히 사람을 제한해 버린다. 당신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람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닌가? 이 또한 과학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물질에 대한 인식도 지금의 과학자가 인식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가 연구하는 중성자요, 원자요 하는 이런 것들은 불안전해서 납 상자에 넣어두지 않으면 곧바로 방사(放射)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현재 자신이 탐측할 수 있는 이론에 근거해 인식한 것이며, 그 역시 단지 이 한 점을 알 뿐이다. 사실 어떤 물체든 모두 생명이 있다. 석가모니부처도 이런 한 마디 말을 했다. 어느 공간의 물체든 모두 물질로 존재하며 물체는 모두 생명이 있다. 중성자, 원자, 감마선 심지어 더욱 미시적인 물질도 모두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 층차에 도달해야 한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연마하는 공은 아주 강한 방사성을 갖고 있는데 수련자는 그것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다. 현대 과학이 우주는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를 말함에, 이렇게 구성된 것이고 저렇게 구성된 것이며, 이런 물질이고 저런 물질이라고 한다. 더욱 높은 인식은 우주는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우주는 가장 근본적으로 말해서 바로 에너지로 구성되었다. 미소(微小)한 물질일수록 방사성이 더욱 강한바 이것이 가장 근본 중의 근본이다. 현재 과학자들이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극미시하에 존재하는 물질, 특별히 미시적이고 미시적인 이런 물질은 실질상 생명이 없는 본원물질(本源物質)이다. 본원물질은 속인의 사유로 상상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본원물질은 몹시 무서운 것인바, 어떠한 물체도 떨어져 들어가면 단번에 흩어져 해체되고 만다. 이런 본원물질은 엄격히 말해서 아직 물질이라고 할 수 없다. 우주에는 眞(쩐)·善(싼)·忍(런)이라는 특성이 있다. 무엇 때문에 물체의 미립자 중에는 다 眞(쩐)·善(싼)·忍(런)이 있다고 하는가? 사실 眞(쩐)·善(싼)·忍(런)은 가장 본원적인 물질 ― 가장 본원적인 그것은 아직 완전히 물질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가장 본원적인 것을 취합하여 원시의 가장 미소(微小)한 원시물질(原始物質)을 만들 수 있다. 만든 후 그것을 결합하여 각종 극(極)미립자 물질을 만들고 또한 이런 미립자 물질을 분화하고, 결합하여 각층 공간의 흙, 돌, 금속원소, 빛과 시간 ― 우주 중의 각종 기초물질로 만든다. 그 다음 더 나아가 생화학적 변화를 거쳐 더욱 큰 물질을 만드는데, 만물은 이렇게 하여 생겨났다. 그렇다면 만사만물(萬事萬物)이 모두 이런 우주특성에서 생겨났다면 그 속에는 자연히 모두 이런 우주법의 제약이 있게 된다. 때문에 어떠한 물질이든 모두 불성(佛性) ― 眞(쩐)·善(싼)·忍(런)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우주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를 불법(佛法) 또는 ‘도(道)’라고 한다.

어떤 물체든지 모두 살아있는 것으로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 다만 어떤 물체든지 모두 피로가 발생할 수 있다. 眞(쩐)·善(싼)·忍(런) 이런 특성 이외, 파생된 물질에 피로가 발생하면 아주 위험한 문제 ― 물체의 풍화와 부식, 즉 물체의 해체에 직면하게 된다. 물체의 해체를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그것은 바로 낮은 층 우주의 부패로서 법(法)이 서지 않음이다. 사람이 만약 마음속에 법(法)이 서지 않으면 사람은 곧 나쁘게 변하며, 도덕적 구속력이 없게 된다. 인류의 도덕이 정상 상태로 유지될 때 법(法)은 지속적인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바, 오직 사람의 마음이 나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육도윤회(六道輪迴)가 있어, 무슨 식물, 동물, 물질, 시멘트, 모래…… 등등으로 전생(轉生)되는데, 어떤 것으로 전화되든지 모두 업력을 갖고 가게 된다. 이로 볼 때 만약 인류가 부패한다면 그것은 단지 인류사회만 부패한 것이 아니라 물질이 모두 부패하게 된 것이다. 말겁(末劫)시기의 이 지구, 우주의 일정한 공간, 화초(花草)·수목(樹木) 모두 업력을 갖고 있다.

육도윤회란 바로 사람이 금생에는 사람으로 전생(轉生)할 수 있으나 내생은 동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육도윤회란 실제로 육도윤회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석가모니부처가 한 말이다. 사람으로 전생할 수 있고, 천인(天人)으로 전생할 수 있으며, 수라도(修羅道)의 귀신으로 전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물, 축생(畜生), 물질 이러한 것들로도 전생할 수 있다.

인류의 과학이 그처럼 높은 데까지 도달하자면 우선 사람의 도덕표준이 반드시 먼저 올라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주대전이 발생할 수 있다. 인류는 절대 기술을 통해 사람을 부처의 층차까지 도달하게 할 수 없다. 무엇 때문인가? 부처, 천인(天人)이 장악한 것은 바로 인류를 초월한 더욱 높은 과학기술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그 수준에 도달하려면 단지 인류의 과학기술 수단만으로는 안 된다. 과학기술 수단으로 돌파한다면  정말 천재(天災)를 불러올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만약 기술을 통해 그렇게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 그렇게 큰 신통(神通)에 도달한다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쟁투심, 탐심, 색심, 각종 욕망, 질투심, 각종 집착심, 명(名), 이(利), 어떤 마음이든 모두 그곳으로 가져갈 것이기 때문에 하늘에는 그야말로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수련이다. 고생스러운 수련 중에서 각종 마음과 욕망을 제거하여 우주특성 眞(쩐)·善(싼)·忍(런)에 동화해야만 비로소 그렇게 높은 층차에 도달할 수 있다. 무엇이 과학인가? 그 부처나, 신(神)이 장악한 그것이 최고의 과학이다. 그는 물질을 가장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바, 미시하에서 이미 어느 정도의 미시물질을 보아냈으며, 우주의 더욱 큰 물질도 보아냈다. 현재 사람들은 이 물질이란, 이런 분자, 작은 것으로는 더 아래로 내려가 원자 등등이고, 더 큰 물질, 최대의 물질은 별(星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별은 아직 가장 큰 물질이 아니며 이보다도 더 큰 것이 있다. 부처가 본 것은 이미 상당히 크며 그가 본 미시적인 것도 상당히 미시적이다. 하지만 이런 정도까지 도달했어도 부처와 여래는 여전히 본원(本源)을 보아내지 못했고, 여래 역시 우주가 최종적으로 얼마나 큰지 보아내지 못했다.

천상(天上)의 사람들은 수련하기가 아주 어려워 거의 수련할 수 없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부처는 고생이 없기 때문이다. 천상의 부처는 고생이 없는바, 모두 기쁜 일, 행복한 일이고 무엇을 가지려면 무엇이 있어 대단히 자유자재하다. 당신이 생각해 보라. 신통광대(神通廣大)하고 고생이 없는데 그가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그가 제고하기란 그야말로 어렵다. 사람은 수련하기가 상대적으로 쉽지만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올라갈 수 없다. 마치 그 병(甁子)과 같이 그 속에 더러운 물건을 가득 채워 물속에 던지면 떠올라오지 못하는 그런 이치로서, 자신을 정화(淨化)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올라올 수 없다.

부처의 대지혜(大智慧)는 그의 그 경계(境界) 중의 대지혜이다. 여래를 배로 초과한 부처의 우주 이치에 대한 인식은, 여래 층차의 인식에 비해 훨씬 더 높다. 그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든 모래알 속에 다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대각자는 어떤 모래알 속, 어떤 돌 속에는 있음을 발견했다. 어떤 돌에는 없는바, 화강암에는 없다. 어떤 돌은 들고 보면 하나의 극히 광활한 세계로서 사람과도 같은 생김새다. 그 돌은 던져도 진동이 없는 느낌인데, 왜냐하면 그 돌은 바로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의 공간 중에 그렇게 놓여있는 것으로서, 물에 잠겨도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광활한 세계인데, 인류가 인식하고 있는 바의 물체의 크고 작음, 이런 개념은 맞지 않는다. 속인이 말하는 바의 크고 작음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체란 당신이 보는바와 같은 이러한 것이지만 그것은 단지 속인 중으로 드러낸 모습에 불과할 뿐이다. 한 장의 종이, 한 장의 그림, 2그람의 얇은 종이 위에 법신(法身)이 있다. 이를 속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데, 그것은 단지 속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구상의 우리 이 물질공간에서, 사람 역시 유일한 인류가 아니다. 과거 어떤 사람이 바다 속에도 사람이 있다는 이 말을 꺼냈는데, 속인사회는 받아들일 수 없어 미신을 퍼뜨린다고 했다. 사실은 정말이다. 대륙판의 변동이 발생하게 되면 바다 속의 아주 많은 해저(海底)가 올라오게 되는데 해저에는 사람이 있는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의 생김새는 우리와 같고 어떤 사람의 생김새는 우리와 약간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아가미가 있고, 어떤 사람은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물고기이며, 어떤 사람은 하반신이 사람이고 상반신이 물고기다.

불교 중의 교훈

현재 일부 화상이 많은 책을 썼는데 쓴 것이 무엇인가? 자간과 행간(字裏行間)이 온통 검고 검어 전부 다 검은 기(黑氣)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은 보아내지 못하지만 그 속의 것들은 이미 말이 아닐 정도로 난잡하다. 이런 현상은 말법시기에 이미 아주 심각하다.

석가모니부처의 법(法)은 인도에서 생겼지만 무엇 때문에 인도에서 소실되었는가? 석가모니부처가 세상에 있을 때 전한 것을, 사람들은 모두 석가모니부처의 요구에 따라 그대로 했다. 석가모니부처가 설법할 때 모르는 것은 물어볼 수 있었다. 당신이 잘못하면 석가모니부처는 당신을 바로잡아 줄 수 있었다. 석가모니부처가 세상을 떠난 후에 많은 승려들이 석가모니부처가 한 말을 자신의 인식에 근거하여 제멋대로 해석했다. 가령, 석가모니부처가 집 높이만큼 수련되었다면 일반 승려는 한 자(尺) 높이밖에 수련되지 못했는데, 그가 부동한 층차에서 여래 과위(果位)까지 법(法)의 내포를 진정하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석가모니부처가 한 말에는 매 하나의 층차마다 그 층차 중의 수련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수련자는 부동한 층차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수련해 올라갈 수 있었다. 그가 부동한 층차로 수련하는 데에는 모두 법(法)의 지도가 있었다. 그러므로 같은 한 마디 불법(佛法)은 매 하나의 층차마다 또 새로운 인식을 갖고 있다. 그 불경의 원문은, 당신이 매번 볼 때마다 모두 새로운 인식이 있게 된다. 제고된 후 다시 불경을 보면 또 새로운 체득이 있다. 바로 이렇듯 끊임없이 인식하면서, 끊임없이 인식을 개변하고 제고한다면 수련 층차는 제고된다.

그러므로 일부 승려들이 일단 속인의 말과 그 자신의 견해로 불법을 말하거나 혹은 책으로 써낸다면 그는 즉시로 사람을 그의 틀 속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그는 불경의 함의(涵義)에 정의를 내렸다. 석가모니부처가 한 그처럼 높은 말과 그처럼 많은 함의를 그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수련됨이 아주 낮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한 말을 수불(修佛) 하는 사람이 믿게 된다면 그는 사람을 자신의 사상 틀 속으로 끌어들여 한정짓게 된다. 이런 현상은 비록 그가 마치 여러 사람들에게 부처를 배우라고 한 것과 같이, 표면적으로는 좋은 일인 것 같지만 불법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법을 파괴하는 데는 여러 가지 형식이 있다. 일부 파괴하는 사람은 불법을 좋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교란한다. 이러한 파괴야말로 가장 분별하기 어렵고 가장 간파하기 어려우며 가장 무서운 것이다. 이것이 석가모니부처의 법(法)이 인도에서 실전(失傳)된 원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석가모니부처의 말을 해석하면서 “석가모니부처가 하신 말씀은 이런 뜻이고, 저런 뜻이다.”라고 한다. 그것은 다만 그의 한 층차에서 그가 깨달은 것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천목이 열려 부동한 층차에서 일부 진상(眞相)을 보지만 석가모니부처가 여래 층차에서 본 것처럼 높고 깊지 못하며 돌파한 공간도 그처럼 크지 못하다. 또한 아주 낮은 층차에서 천목이 열린 사람은 그가 볼 수 있는 공간이 아주 적으며 볼 수 있는 우주공간도 아주 낮다. 부동(不同)한 층차에는 부동한 이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불법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모두 자신이 인식하는 틀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그는 불법을 교란했는가 아니면 불법을 수호했는가? 그러므로 누구도 그 경서는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 경서의 원뜻에 좇아 깨닫고 수련하라! 누구도 경서 중의 어떠한 한 글자도 함부로 해석할 수 없다. 부동한 층차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인식을 말하는 것은 가능하며 여러 사람들이 상호 간의 체득을 말할 수는 있다. 즉, “나는 깨달았는데 현재 내가 깨달은 것은 이런 뜻이다. 내 생각에 어떤 일을 내가 잘못했는데, 나는 어떻게 개선하려고 한다.”거나 “이 말은 나에게 한 말이고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로서, 나는 정말로 좋다고 느낀다.”는 등이다. 그가 다시 제고되어 다시 보면 같은 한 마디 말에 또 새로운 인식이 있다는 것을 그는 발견한다. 이것이 바로 제고인바 모두 이렇게 깨달으며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다.

현재 어떤 화상 혹은 거사(居士)는 많은 글을 썼는데 모두 자신이 쓴 것을 경(經)으로 삼고 있다. 오직 부처가 말한 법(法)만이 경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쓴 것들이 포함된 이런 것을 어찌 경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경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많은 거사와 화상은 명(名)과 이(利)를 추구하여 허례허식을 즐기기까지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를 좋다고 추켜올리면 그는 득의양양해한다. 수련자라면 착실하게 수련해야 한다. 진정한 수련은 바로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속인 중의 명(名)이요 이(利)요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과 쟁투심이요 과시심이요, 질투심이요 하는 것과 각종 속인의 욕망, 각종 마음을 모두 제거해 버려야 한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세속 중에서 그의 영화(榮華)를 뽐낸다면, 이런 사람은 얼마나 많은 집착심이 반영되어 나오겠는가? 진정하게 수련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을 보기만 해도 괴로워한다. 또 어떤 수불(修佛)하는 사람은 돈과 재산에 대한 욕망이 아주 큰바, 겉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마음(心念)이 움직이기만 하여도 수련 층차가 높은 사람이나 부처는 바로 알아차린다.

여기에서 주로 이야기한 것은 전업수련자(專修)인데 사실 여기에는 불학(佛學)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을 포함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부처를 배우는 것인가? 수련하는 사람은 무엇을 수련하는가? 바로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속인 중의 욕망을 모두 아주 담담하게 보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도를 얻은 많은 사람이 깊은 산으로 들어가 말법시기의 절에 있기를 싫어하는가? 심산수림(深山老林)으로 간 원인은 그들이 절 안의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많은 화상들이 모두 내려놓기 싫어하는 집착심이 있고 이로 인해 아귀다툼을 하며 또한 정토(淨土)가 아니고, 진짜 수련하는 곳이 아니기에 멀리 피한 것이다.

물론 일부 사교(邪敎)·마교(魔敎)가 공개적으로 파괴했다. 이런 것은 사람들이 분별하기 쉬워 척 보면 삿된 것을 알아낸다. 그러나 불교의 기치를 내걸고 파괴하는 이것이 가장 심각하다. 석가모니부처는 무엇 때문에 그의 법(法)이 말법시기에 이르러 사람을 제도할 수 없다고 했는가? 지금이 바로 말법시기이다. 화상이 자신을 제도하기도 매우 어려운데 하물며 사람을 제도하랴! 내가 말법시기의 현상을 말해냄으로써 일부 사람들은 홀연 크게 깨달았다. 지금 이 사회의 발전은 아주 무섭다. 당신이 보라! 각종 가짜, 삿된 것, 악한 것, 난잡한 것들이 모두 나왔다.

여기에서 이러한 이치를 말하는 것은 누구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많은 화상이 책을 쓰지 않았는가? 표면적으로는 마치 불법을 널리 펴내려는 것 같지만 뼛속으로는 명리(名利)를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그가 어떠한지를 묻는다. 나는 말한다. 당신이 그의 명성이 대단히 큰 것만을 보지 말라, 제멋대로 불경을 해석하고 자기를 선전하여 사실 그는 일찍이 지옥 속에 있다.

경(經)·율(律)·논(論)은 경(經)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법의 원뜻을 파괴했다. 지금 어떤 사람이 삼장(三藏)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삼장이 아니라 바로 불경(佛經)이며 경은 바로 경이다. 다른 것들은 모두 경(經)과 함께 나열할 수 없다.

인류의 타락과 각자(覺者)의 출현

인류의 타락은 예수가 말한 하와(夏娃) 그때부터 시작한 것만이 아니다. 이 지구는 문명과 원시(原始)의 시대가 한 차례뿐만이 아니었고, 사전(史前)의 문명 그것 역시 훼멸되었다. 때때로 지구는 철저히 훼멸되거나 혹은 새롭게 바뀌어 완전히 새로운 지구로 만들어졌다. 인류는 겁난(劫難)을 말하지 않는가? 사실 종교에서 하는 말이다. 매번 어느 시기에 이르면 한 차례 큰 겁난이 일어나고, 매번 어느 시기에 이르면 한 차례 작은 겁난이 일어난다. 작은 겁난에서는 어느 일정 지역의 인류가 훼멸되는데, 어느 일정 지역이 몹시 나쁘게 변하면 바로 그것을 없애버린다. 지진이 일어나거나, 대륙판이 가라앉거나, 모래폭풍으로 덮어버리거나, 혹은 무슨 전염병이 돌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인데, 작은 겁난은 국지적이다. 큰 겁난, 그것은 거의 전 인류적인 겁난이다. 이런 큰 겁난은 오래고 먼 연대를 거쳐서야 비로소 한 차례 일어난다. 이 지구의 운행과 물질의 운동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도 법칙이 있다. 운행과정 중에 일어나는 큰 겁난은 인류가 완전히 훼멸 상태에 처함을 말한다. 하지만 소수 사람이 살아남아 일부 사전문화를 계승하여, 마치 석기(石器)시대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노동도구가 모두 없어졌기 때문에 다음 한 세대에는 더욱 나빠지며 많은 것들이 모두 실전된다. 다시 원시상태에서 번성해나가 문명과 과학기술이 나타난다. 인류의 부패에 따라 또 겁난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성(成)·주(住)·괴(壞)의 주기적 변화가 시기를 달리하여 일어난다.

다시 말해 인류는 예외 없이 패괴(敗壞)되게 마련인데, 매 시기 문명이 나타날 때마다, 늘 천신(天神)은 일부 대각자를 속인사회에 파견하여 사람을 제도한다. 목적은 바로 지구에서 사람의 사상과 물질의 패괴가 비례하지 않게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이 우주 중에서 지구를 구성하는 일체 물질은 모두 일종의 특성이 존재한다. 이런 특성이 있어야만 비로소 원시적이고 무형적인 것을 유형적인 물질, 생명이 있는 물질로 이뤄낼 수 있다. 그러나 물질이 아직 패괴되기 전에 만약 인류의 사상이 패괴된다면, 이것은 허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매번 인류의 문명이 출현하고 인류의 문화가 출현할 때면 대각자가 나타나는데 각기의 사전시기마다 대각자가 나타났다. 이번 차례 문명에 예수, 석가모니, 노자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알려준 것과 같다. 매 시기 문명이 출현한 지역은 각기 다른 각자가 책임을 지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반본귀진(返本歸眞)하는가를 가르쳐, 도(道)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원만케 하고, 속인에게는 德(더)를 중히 여기게 하여, 인류의 도덕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게 하고 사람의 사상이 쉽게 패괴되지 않도록 한다. 궁극적으로 전반 우주물질이 모두 패괴될 때 그때는 더는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오래고 긴 과정이다.

이 시기에 이런 각자가 하는 일은 인류가 패괴하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 수련하여 올라갈 수 있는 사람에게는 확실하게 수련하여 도(道)를 얻을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윈이 말한 것처럼 원숭이에서 진화되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 스스로 자신을 짓밟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우주의 각개 공간에서부터 떨어져 내려왔다. 그가 그 한 층 우주 법(法)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을 때 그는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우리가 말한 것처럼 속인의 마음(凡心)이 중(重)할수록 더욱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줄곧 속인 이런 상태까지 떨어져 왔다. 고급 생명이 볼 때 사람의 생명은 당신에게 지구에서 사람이 되라는 것만이 아니며 당신으로 하여금 지구에서, 미혹된 이런 환경 중에서 하루빨리 깨닫고 되돌아가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참뜻으로 당신에게 하나의 문을 열어주었다. 되돌아가지 못하면 업이 커져서 훼멸될 때까지 계속 윤회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구에는 곧 여러 차례의 겁난이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지구는 바로 우주의 쓰레기장이다. 끝없이 방대한 우주에는 무수한 성계(星系)와 무수한 별(星球)이 있으며 별마다 모두 생명체가 있다. 사람은 다른 공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생명의 존재를 볼 수 없다. 그 생명체는 동일한 별(星球)의 다른 공간에 있으며 우리 이 공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속인은 그를 볼 수 없다. 인류는 이 공간의 화성(火星)이 아주 뜨겁다고 말하지만, 그 공간을 돌파하기만 하면 그쪽은 도리어 찬 것이다. 많은 사람이 특이공능으로 태양을 보는데, 보면 볼수록 뜨겁지 않고 더 보면 검은 것이며, 또 더 보면 서늘한 세계이다. 그 생명체가 이 물질공간에서는 이렇게 반영되지만 다른 물질공간에서는 다른 모양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도처에 다 생명이 존재하며 사람이 존재한다. 그 층차의 표준에 부합되지 않으면 조금씩 아래로 떨어지는데 마치 학교를 다니면서 낙제하는 것과 같이 곧 속인 중으로 떨어져 내려온다. 우주 중에서 좋지 못한 사람은 아래로 떨어지는데 우주의 가장 중심인 ― 지구로 떨어져 내려오게 된다.

사람은 속인사회 중에서 윤회하는데 윤회는 꼭 사람으로 되는 것만이 아니다. 그는 많고도 많은 물질, 많고도 많은 식물, 많고도 많은 동물 심지어 미생물로까지 전생(轉生)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윤회 중에서 모두 자신이 한 모든 좋지 못한 일 ― 업력(業力)이 따라 다니게 된다. 생명이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德(더)와 업력으로서 영원히 몸에 지니게 된다. 만일 업력이 커서 나무로 전생되면 나무에도 업력이 있게 된다. 동물로 전생되면 동물도 업력이 있게 된다. 지구상의 벽돌, 흙, 돌, 동물, 식물은 모두 업력이 있다. 현재의 말겁시기 사람에게는 먹는 약이나 주사약이 이전과 같은 효과가 없는데,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지은 업이 너무나 많고, 강대하여 원래의 약 효과가 하나도 없고, 그 병을 전혀 없애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센 약을 대량으로 쓰게 되면 사람은 중독된다. 지금 많은 병은 아예 치료하지도 못한다. 지구전반이 다 이러한데 사실 모든 것이 아주 심하게 패괴되었다.

예수는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죄를 감당할 수 있었고, 석가모니부처는 사람을 제도하느라 49년간 온갖 고생을 겪었다. 그들은 중생을 널리 제도함을 말하지 않았는가? 그럼 무엇 때문에 그들은 사람을 모두 위로 데려가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한 층의 표준에 부합되지 않아서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층이든지 어느 한 층의 표준이 있다. 당신이 대학생이 될 자격이 없는데 당신이 대학에 다닐 수 있겠는가? 당신은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고 신체가 너무 무거워 올라가지 못한다. 당신의 도덕표준이 어느 위치에 있다면 당신은 바로 그 위치에 있게 된다. 유일한 방법은, 마치 학교에 다니는 것과도 같이,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올라가고, 남아 있는 것은 갈수록 더 패괴하니 그들은 곧 그를 훼멸(銷毁)해 버리는 것이다. 쓰레기가 이미 썩어 우주를 오염시킬 수 없기에 훼멸할 수밖에 없다.

중생을 널리 제도한다는 그것은 부처가 한 말이다. 다시 말해 여래 그 층차 중에서는 중생을 널리 제도함을 주장하지만, 여래를 배로 초과한 그처럼 큰 부처는 속인 중의 일을 상관하지 않는다. 더 상관하면 한 마디 말에도 속인 중에서는 곧 변화가 생기므로, 더 관여할 수 없다. 그의 역량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더 크다면 지구는 부처의 발가락 하나도 놓을 수 없고, 또 더 크다면 지구는 부처의 솜털 하나도 놓을 수 없다. 부처의 말은 곧 법(法)이다. 말하면 곧 변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구의 일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단지 여래가 중생을 널리 제도하고 보살이 중생을 널리 제도함을 말할 따름이다.

여래불(如來佛)은 사람을 속인이라고 하지만, 더욱 높은 신(神)이 아주 높은 층차에 도달하여 되돌아보면 여래 역시 속인이다. 그렇게 높은 신(神)이 사람을 보면 미생물보다도 못하다. 척 보니 이처럼 썩은 곳이니 없애버리자! 훼멸해 버리자!! 지구는 바로 이러한 곳이다. 사람에 대하여 불쌍하다고 말하는 그것은 사람에 가장 근접한 이 한 층의 부처가 말한 것이다. 예수 역시 여래 이 층차이며 노자 역시 마찬가지다. 더욱 높으면 사람 중의 일을 상관하지 않는다. 사람이 그를 불러도 듣지 못한다. 사람이 그의 이름을 불러도 다 그를 욕하는 것으로 되는데 마치 대변 속에서 나오는 소리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다.

학자와 수련은 별개의 일이다

예수 역시 여래 이 층차이다. 여래는 과거에 부처 중에서 가장 낮았다. 과거에 여래 이하는 부처라고 부르지 않았고 보살(菩薩)·나한(羅漢)이라고 불렀다. 여래마다 자신의 천국이 있다. 우리 은하계 중에는 백여 여래가 있다. 다시 말해서 부처의 천국세계가 백여 개 있다. 매 세계는 한 여래가 주지(主持)한다. 매 천국세계의 여래는 모두 자신만의 수련방법이 있으며 사람을 제도하는 데도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 자기 세계의 형성과 그 자신의 수련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그 자기 세계의 구성 역시 수련하여 얻게 된다. 그러나 이 한 세계의 형성은 근대인이 수련하여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셀 수 없는 무수억년(無數億年) 전에 이미 형성된 것이다.

이 속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 속인은 수련에서 수련 방법을 좀 더 장악하고, 종교 중에서 다른 종교 중의 것을 좀 더 앎으로써 사람의 두뇌를 풍부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수련을 모두 속인 중의 지혜·지식이라고 간주한다. 사실 그것은 속인 중의 지식이 아니며 속인의 관념으로 이해할 수 없다. 무엇 때문에 사람은 수련함에 心性(씬씽) 수련을 반드시 중히 여겨야 한다고 하고, 도가는 德(더)를 중히 여겨야 한다고 하는가? 바로 이 우주에는 법(法)이 있고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우주특성이 매 층차에서 매 생명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같지 않다. 사람은 속인 이 한 층차 중에 있기에 속인의 도덕표준에 부합되어야 한다. 즉 무엇 때문에 德(더)를 중히 여기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다고 하는가? 바로 속인을 벗어난 그 한 층차에 천인(天人)의 표준이 있기 때문인데, 만약 당신이 그 한 층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곧 올라가지 못한다. 무엇 때문에 천상의 신(神)이 떨어져 내려오는가?! 나한이 수련을 잘못해도 떨어져 내려와야 하는가? 바로 그 한 층차의 표준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은하계에는 천국이 백여 개 있으며, 매 천국에는 한 여래가 그의 천국을 주지(主持)하고 있다. 그의 천국 특성도 그의 수련방법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종교나 다른 어떤 수련방법이든 모두 표면적인 동작이 아주 간단한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데, 가부좌를 하고 제인(結印)을 하면 된다. 도가(道家)가 그렇게 많지만 동작은 아주 간단한 몇 개뿐이다. 그는 무엇 때문에 부처·보살·나한의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 바로 그의 진정한 공의 연화(演化)는 극히 복잡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세포마저도 다 연화해야 하며 그렇게 많은 신통까지도 다 연화해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아직 모르는 많고 많은 것과 부동한 층차에 적응하는 것을 다 연화해 내야 한다. 예를 들어 말하면 속인사회의 가장 복잡한 정밀기기보다도 더 복잡한 것으로서, 사람으로서는 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계에는, 수련은 자신이 하나 공(功)은 사부에게 달렸다는 이런 한 마디 말이 있다. 다시 말해서, 도가 사람들이 수련방법에 대해 말해 왔지만, 진정한 수련방법,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이치와 염원으로서, 단지 개념상의 것일 뿐이다. 정말로 진정한 고에너지물질의 공을 수련해 내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신의 소망이 있어야 하며 이렇게 하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공간에서의 진정한 연화(演化)는 극히 복잡한 것으로 사람은 해낼 수 없으며 모두 사부가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곧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만약 다른 법문의 것을 섞어서 연마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과거에는 화상으로 하여금 다른 법문을 접촉하지 못하게 했는바, 절에서는 역대로 화상들이 다른 법문의 책을 보는 것을 엄금했다. 지금의 화상은 모두 난잡해졌다. 과거에는 세속 중의 것은 모두 가지면 안 되었으며 또한 다른 법문(法門) 중의 책을 보는 것도 절대적으로 금했는데, 바로 그로 하여금 반드시 단일한 수련방법으로 한 문(門)을 틀어쥐고 수련할 수 있게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상과 의념 중의 모든 것이 이 한 법문의 것이어야만 비로소 공고하게 위로 수련할 수 있으며 한 갈래 길을 따라 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당신이 다른 법문의 것을 섞는다면 마치 텔레비전에 사진기의 부품을 넣어 텔레비전을 곧 못쓰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바로 이러한 뜻이다. 섞어서 연마(練)하기만 하면 전반 공(功)이 다 난잡하게 되므로 더는 수련해 올라갈 수 없다. 진짜와 가짜도 분별하기 어려우며, 만일 삿된 것, 가짜인 것을 섞는다면 당신은 전반적으로 헛되게 수련하게 된다. 사부도 방법이 없는데 그것은 당신의 心性(씬씽)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공의 연화(演化)는 극히 복잡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속인 중의 이론으로 간주하고 있다. 기독교의 것을 좀 배우고 불교의 것을 좀 배우며 도교의 것을 좀 배우는가 하면 유교의 것을 좀 배우는, 무슨 다교동당(多敎同堂)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은 함부로 하는 짓이다. 이것이 바로 말법시기에 나온 이런 가장 큰 한 가지 문제다. 사람은 모두 불성(佛性)이 있고 모두 수련을 하려고 생각하며 모두 선(善)해지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속인 중의 이론으로 간주하고 있다. 속인 중의 기능은 아마 좀 많이 배우면 좀 더 좋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난잡하고도 또 난잡하게 되어 전혀 수련할 방법이 없으며 전혀 공이 없다.

불성(佛性)

어떤 관념이 형성되면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는데, 사람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이르기까지 이 사람의 사상을 좌우지할 수 있다. 이는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만약 이 관념이 시간이 길어지면 사람의 사상 중으로 녹아 들어갈 수 있는데, 정말로 자신의 대뇌 속으로 녹아 들어가, 이 사람의 성격을 형성할 수 있다.

형성된 관념은 당신의 일생을 저애하고 지배할 수 있다. 사람의 관념은 흔히 이기적이고 또 좋지 않기에 사상업력을 생기게 할 수도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또 업력의 통제를 받게 한다. 사람은 主元神(주왠선)에 의해 주재(主宰)되어야 하는데, 主元神(주왠선)이 마비되어 관념으로 대체된다면, 그럼 당신은 무조건적으로 투항한 것이 되어, 생명은 이러한 것들에 의해 좌우지된다.

당신 자신은 선천적인 자기 자신으로서 불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물을 인식할 때 흔히 일종 관념이 형성되기 쉬운데, 이런 관념은 자기가 아니다. 그 어떤 관념도 없이 문제를 보면, 모두 자신의 선량한 본성에서 나온 견해가 있고, 진정한 자신의 견해가 있게 되어, 자비롭고 선한(慈善) 마음으로 사물을 보게 된다. 당신 자신이 자신을 더욱 드러내 노출할 때일수록 당신의 사상은 더욱 높고, 더욱 진(眞)에 가까우며, 당신의 선천적인 선량한 본성의 경지(境界)를 갖게 된다. 인체를 구성하는 물질은 극미시하에서, 극미시하의 미립자 중에서 사람의 본성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불변하는 것이다. 사상의 틀을 배제하고 보면 사람의 선량한 성격(脾氣), 천성, 특성, 특징을 체험하고 관찰해 내기가 쉬운데 그것이 진정한 자기이다.

主元神(주왠선)은 사람이 형성한 관념 때문에 개변될 수 없다. 主元神(주왠선)은 사람이 형성한 관념 때문에 主元神(주왠선)의 본질마저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는, 사람의 각종 관념, 각종 업력으로 인하여 사람의 본성이 매몰되고, 덮이며, 완전히 둘러싸여 본성이 나타나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主元神(주왠선) 자체는 개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업력은 그렇게 미세한 물질이 없기 때문이다. 업력은 속인 중에서 빚어낸 것으로 속인 중의 물질이다. 이것은 그렇게 미시적이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만들 때의 그것은 극히 미시적인 물질이다. 그러므로 업력은 섞여 들어갈 수가 없고, 단지 사람의 본성이 매몰되었을 뿐이다. 본성은 사물에 대하여 자체의 견해가 있다. 만약 정말로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을 타파하고 사람의 본성적인 견해를 되돌려 나타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온 그곳이다. 초기에 형성된 당신의 관념이 바로 초기에 당신을 만들어낸 곳의 관념이다. 하지만 후천적인 의식관념을 타파하기란 아주 어려운데 이것이 바로 수련이기 때문이다.

법(法)은 부동(不同)한 층차에서 부동하게 체현한다. 이 층차에는 이 층차의 체현이 있다. 당신이 이 한 층차에서 산생된 생명이라면 당신은 이 한 층차 법(法)의 관념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당신의 진정한 본성이 되돌아 나온다면 당신의 인식표준은 곧 거기에 있게 되는데 그 표준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

업력에는 眞(쩐)·善(싼)·忍(런)의 표준이 없는바, 그것은 그것이 이 관념을 형성할 때의 표준으로 사물을 가늠하며, 사람을 속인들이 말하는 아주 교활하거나 혹은 처세에 능한 사람으로 되게 한다. 이는 다시 말해, 사람이 수련할 때 부동(不同)한 사상업력이 작용을 일으키게 하여 수련을 저애한다. 사람이 만약 업력의 저애가 없다면 수련은 아주 쉬운 것이다. 이 업력은 여러 해 전에 어떤 상태 하에서, 어떤 도덕표준 하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업력은 곧 이런 표준으로 사물을 가늠한다. 만약 이것이 많이 형성되었다면 사람의 일생은 모두 그것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 형성된 관념이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곧 이것이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며 곧 마땅히 이러이러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자신은 없다. 그 자신은 완전히 그 자신이 후천적으로 형성한 선량하지 않은 후천적 관념에 포위되고 가려진다. 그는 진정하게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자신의 표준이 없게 된다.

관념은 대뇌의 사상(思想)속에서 형성되는데, 관념이 만든 사상업은 사람의 머리에서 하나의 업력덩어리를 형성한다. 선념(善念)이라고? 불교에서는 생각만 해도 곧 업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른바 선념이란 더욱 높은 표준에 서서 가늠해 보거나 眞(쩐)·善(싼)·忍(런)이란 더욱 높은 표준으로 보면 역시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속인이라면 모두 자신을 찾을 수 없는데, 이 관념은 사람의 일생만 좌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내려가며 계속 좌우지한다. 언젠가 변화가 일어나면 그 때서야 제거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줄곧 내려가며 좌우지한다. 이 관념이 더욱더 강대해지면 정말 그 자신은 없어지게 된다. 지금 업이 구르고 구른다고 말하는데, 모두 이러한 정도에까지 굴러왔다. 당신이 그러한 속인을 보라. 온종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부동(不同)한 사람, 부동한 근기, 부동한 오성이라고 함은 바로 이런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누가 깨달을 수 있다면 바로 그의 불성이 다시 나올 수 있는 것으로, 그는 희망이 있다. 누가 깨닫지 못한다면 바로 후천적인 의식관념에 너무나도 깊이 매몰된 것으로, 희망이 없다.

도(道)를 닦지 않아도 이미 도(道) 속에 있다

수련을 수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의 수련하는 방법이 있으며 걸어갈 한 갈래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이런 한 마디 말이 있었다. 즉 ‘이 사람이 도를 닦지 않아도 이미 도(道) 속에 있다.’ 소도(小道)에 따르면 그는 무(無)를 말하고 공(空)을 말한다. 세상을 살아감에, 일체를 모두 인연에 따른다.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내가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이라면 나에게 줄 것이고, 얻지 말아야 할 것이라면 나는 갖지 않겠다고 한다. 그는 또 일반적인 형식을 채용하여 수련하지 않으며, 수련을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사부가 상관하고 있어 다른 사람과 마찰도 거의 없다. 이것이 바로 과거에 사람들이 말한 ‘도(道)를 닦지 않아도 이미 도(道)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일반인도 구하는 바가 없음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이런 사람은 결국 과위(果位)를 얻지 못한다. 그는 공(功)을 얻을 수 없으며, 그는 단지 끝없이 德(더)를 쌓을 뿐인데, 아주 많은 德(더)를 쌓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있어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해도 아주 어렵다. 이럴수록 德(더)를 더 많이 쌓게 된다. 만약 연공을 한다면 당연히 아주 많은 공(功)으로 전화할 수 있다. 만약 연공을 하지 않는다면 내생에 복을 받아 큰 벼슬을 하거나 큰 부자가 될 것이다. 물론 도(道)를 닦지 않아도 이미 도(道) 속에 있는 대다수의 이런 사람들은 모두 내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어떤 사람이 그를 관장하고 있다. 그 역시 도(道)를 닦지는 않으나 그의 사상 경지는 도(道) 속에 있으므로, 그는 장차 그가 있던 원래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도(道)를 닦지 않았는데도 그가 이미 수련된 것은 바로 누가 그에게 공을 연화(演化)해 주었기 때문인데, 자신은 모르고 있다. 일생이 온통 재난이라, 고생을 겪으며 업을 갚다 보니 心性(씬씽)이 일생 중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고되는, 그는 늘 이런 상태에 처해 있다. 이는 모두 내력이 있는 것이다. 속인이라면 해내기가 정말 아주 어렵다.

공자(孔子)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되는 방법, 중용(中庸)사상을 남겨 놓았다. 노자가 말한 것은 수련의 방법이다. 그러나 중국 사람은 실제로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을 한데로 합쳤다. 송대(宋代)부터는 불가사상도 줄곧 그 속에 섞였다. 그래서 그 후의 불가사상 역시 면모가 전혀 달라졌다. 송대(宋代) 이후에는 불교 속에다 중국 유교의 것들을 더해 넣었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등등 매우 많은 것이 다 이런 유의 것이다. 불가에는 이러한 것이 없다. 불가에서는 인간 세상의 것을 아주 가볍게 보며, 그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생생세세로 부모가 얼마나 있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당신은 이러한 집착심을 모두 내려놓고 아주 청정하게 수련해야만 비로소 수련 성취할 수 있다. 모두 집착심으로, 유가사상을 불가에 섞어 넣은 후 육친정(親情)에 대한 집착문제가 나타났다.

흙으로 사람을 만든 이야기

사람은 가장 낮은 이 층차에 있고, 그 다음에 한 층의 하늘, 또 한 층의 하늘이 있다. 여래는 이 한 층차에 있다. 예수는 여래 이 한 층차에 속하고, 노자(老子) 역시 여래 이 한 층차에 속한다. 그들이 이 한 층차 중에서 보는 것은, 다만 그들 이하의 것일 뿐, 그 이상은 아주 적으며, 더욱 높은 것은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층차가 그에게 곧 이만큼의 지혜만 갖도록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이것은 그가 믿고 있는 천주(天主)가 들려준, 하느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냈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그가 말한 흙이, 우리 속인의 흙을 뜻하는가? 아니다. 우리 속인의 흙이 아니다. 고층공간의 물질은 흙을 포함하여 모두 더욱 미시적인 고에너지물질이다. 그가 말하는 이 사람은 그럼 어느 때에 만들어진 것인가? 그 한 차례, 지구가 문명에 들어서기 전의 그 때에 산생된 것인가, 아니면 어느 때인가? 실제로, 오래고 먼 전설 중에 이런 한 가지 일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의 이야기는 ― 하느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 이쪽의 흙이 아니다. 그쪽의 흙은 모두 영성(靈)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쪽을 구성하는 물질을 우리 이쪽으로 가져오게 되면 마치 공(功)과도 같은 것이 된다. 그의 말뜻은 저쪽에서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천인(天人)은 우리 이쪽의 사람보다 피부가 연하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이 층의 물질세포가 없으며 더욱 미세한 물질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속인의 이 공간으로 밀려왔을 때 그가 사람과 마찬가지임을 발견하게 된다. 보기에 그는 특별히 아름답고 연하게 생겼다. 그렇게 되어 사람에게는 더욱 큰 한 층의 신체물질세포를 더해 주어야만 했다. 그래서 사람은 곧 지금의 이 모양으로 되었다.

천상의 사람도 신체가 있는 것으로 그가 여기로 날아오면 우리와 같은 모양이다. 중국의 큰 산 아래에는 천인(天人)의 시체가 묻혀 있는데, 죽은 후 일부를 산 밑에 묻어놓은 것이다. 보기에는 우리 사람과 비슷한데, 이는 경서(經書) 중에서 말한 것과 같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가 세상에 있을 때 경서를 남기지 않아 후세의 신도들이 당시 정황에 근거하여 쓴 것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부처도 경서를 남기지 않았으며 역시 신도가 쓴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신도들은 이런 말을 들어도, 그의 원뜻이 무엇이고, 그가 가리키는 것은 어떤 사람이며, 어느 역사 시기의 일인지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냈다고 말하자, 속인은 ‘우리 이 신체는 흙이 아니지 않은가’라고 생각한다. 아주 높고 아주 높은 층차의 그 흙은 우리 이 육신보다 더 좋기 때문인데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좋다고 한다.

상당히 오래고 먼, 아직 낮은 층차의 사람이 없을 때, 위에서는 다른 공간 속에다 사람을 만들었다. 내가 공간에 대고 무엇이 형성되라고 말하기만 하면 즉시 형성된다. 또한 마음대로 어떠한 것이든 만들어낼 수 있으며 공중에서 그리기만 해도 바로 형성된다. 하지만 다른 공간에서다. 다시 말하여 과거에 세계를 만든다거나, 한 층의 하늘을 만든다거나, 불경에서 말하는 우주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바로 불력(佛力)의 체현이다. 그 뜻은 바로  좋은 업(好業), 선업(善業), 악업(惡業)을 모두 업(業)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부처가 창조해 준 것이다.

아주 큰 능력이 있는 부처는 한순간에 정말로 한 층의 하늘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층차가 높을수록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낸다. 또한 손을 움직일 필요도 없이 입으로 말만 해도 곧바로 형성되는가 하면, 더욱 높은 층차에서는 생각만 해도 곧 이루어지는데, 척 생각만 하면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여래보다 높은 그 이상의 부처는 속인 중의 일을 상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만 해도 지상에서는 곧바로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래부처 역시 직접 상관하지 않으며, 그는 단지 지도만 할 뿐, 보살이 가서 한다.

현대과학의 틀과 불법의 박대정심(博大精深)

불법(佛法)이라, 인류는 이미 석가모니부처가 전한 법(法)에서, 불법이 아주 큼을 감수했다. 그러나 법(法)은 거대하고도 거대한 것이다. 석가모니부처가 그의 그 층차에서 말한 것은 여래법(如來法)이지만 속인이 볼 때는 이미 아주 높은 것이다. 과거에는 오직 여래만을 부처라고 부를 수 있었다. 보살·나한은 모두 부처가 아니며 모두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때는 부처라 하면 곧 여래를 가리켰다. 그러나 여래는 우주에서 가장 높은 부처가 아니라 우주 중에서 가장 낮은 부처이다. 부처 중에서 가장 낮은 층차에 있는 부처만이 속인의 일을 상관할 수 있으며 너무 큰 부처는 상관할 수 없다. 입을 떼기만 하면 지상은 곧 변화가 생기는데 그래서야 되겠는가. 큰부처는 전혀 상관하지 않으므로 여래가 곧 상관하게 된다. 여래 역시 직접 상관하지 않고 보살이 사람을 제도하는 일을 한다. 그러므로 여래 그 한 층차에 도달했다면 이미 아주 대단한 것이다.

미시적으로, 그는 모래 한 알 속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석가모니부처는 삼천대천세계 학설을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은하계에는 우리 인류가 있는 성구(星球)와 같은 것이 3천 개가 있으며, 우리 사람과 같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사실 어찌 3천 개뿐이겠는가. 그는 또 말했다. 모래 한 알 속에 삼천대천세계가 있다고. 모래 한 알 속에 마치 인류 이 세계와 같은 것이 3천 개가 존재한다는데,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천목이 열리면 물건을 확대해 볼 수 있는데, 그는 이미 미시 상의 그런 미시적인 것을 보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모래 한 알 속에 삼천대천세계가 있다면 그 모래 한 알 속의 삼천대천세계에는 바다가 있으며 하천(河流)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천의 그 모래 속에 또 삼천대천세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석가모니부처도 물질의 본원을 보지 못했다. 그가 말하기를 작기로는 안이 없다(其小無內)고 했는데 작게는 물질의 본원을 볼 수 없었다.

지금의 물리학설은 단지 이 분자는 원자로 구성되었으며 원자는 원자핵, 전자로 구성되었음을 인식할 뿐이다. 더 미시적으로 쿼크, 중성미자가 있다. 이것이 끝이며 더는 없다. 더 아래로 물질의 본원은 무엇인가? 쿼크, 중성미자에 이르면 현미경조차도 보아내지 못한다. 모두 다른 기기의 도움을 받아 그의 존재를 알게 된다. 더 아래로는 무엇이 있는지 인류의 기술로는 요원하다. 크기로는, 인류는 별이 가장 큰 물체라 여긴다. 석가모니부처는 이렇게 보지 않는다. 석가모니부처는 이미 아주 크게 보았다. 그는 별이 가장 큰 것이 아님을 발견했다. 더 위로 보아도 끝을 볼 수 없으므로 마지막에 크기로는 밖이 없다(其大無外)는 한 마디 말을 했다. 크기로는 밖이 없고 작기로는 안이 없는데 큰 것은 변두리가 없고 작은 것은 바닥을 볼 수 없다.

생명은 복잡한 것이며 우주의 구조 역시 극히 복잡한 것이다. 인류가 장악한 지식은 오늘까지 발전되어 이미 정점에 이르렀다. 정점에 이르면 곧 인류 과학의 발전을 제한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말하면 많은 대과학자들이 많은 정의(定義)를 내렸는데 물리학적인 것도 있고 화학적인 것도 있다. 이 정의를 초월하지 않았을 때는 그가 한 말이 모두 맞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에 따라 발전한다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치는 한 층 한 층 제고되는 것이다. 당신이 그의 정의를 초월했을 때, 당신은 그가 내린 정의가 사람을 제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현재의 과학 역시 마찬가지로서 어떤 사람이 과학에 내린 정의에 따라 발전한 것만이 비로소 과학이라고 인정한다. 당신이 정의의 범위를 초월하지 않는 한, 모두 그것은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그의 정의를 초월하게 되면, 당신은 그것이 인류의 발전을 제한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으면 그는 일률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국한성이 너무 크다. 우리가 말하는 불도신(佛道神)은 모두 사람들이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다른 공간의 존재이다. 만약 지금의 과학방법으로 그를 탐구해 낸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닌가? 그 역시 과학이잖은가! 그러나 서양은 과학에 이미 하나의 정의를 내렸는데, 현대과학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일률적으로 신학(神學)·종교에 귀속시켰다. 그것을 과감하게 인정하지 못한다.

서양의 과학은 극단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사물을 인식함에 불가에서는 성(成)·주(住)·괴(壞)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성(成)이란 바로 형성된 것을 말하고, 주(住)란 바로 일정한 단계를 유지함을 말한다. 유럽의 과학은 자신이 내린 틀에 따랐기에 이미 더 전진할 수 없게 되었다. 계속 아래로 연구하여 발견하게 되는 것 또한 그들 과학 틀 속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률적으로 종교에 귀속시키거나 신학에 귀속시켰다. 사실 현대인의 과학기술로, 지금의 과학영역 중에 없는 것을 탐구해 내거나 혹은 당신이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을 발견하여, 지금의 과학방법으로 연구한다면 역시 과학이 아닌가? 그러나 서양의 과학은 일찍이 과학의 정의(定義)를 철칙으로 규정해 버렸으며 일단 그것의 범위를 벗어나기만 하면 일률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슨 발전할 여지가 없다.

일부 과학자, 소위 어떤 한 영역에서 일부 성취가 있는 사람, 그 역시 많고 많은 정의를 내렸다. 뉴턴, 아인슈타인을 포함하여 이런 과학자들은 이미 속인 중에서 많은 업적을 세웠으며, 일반인에 비하여 아주 멀리 보았다. 그가 내린 이런 정의는 사람에게 남겨주는 것으로 하나의 귀중한 지식재산이다. 그러나 그의 이 범위 내에서는 어떻게 연구하며 어떻게 인식하든지 모두 법칙이 있다. 후세인들이 전적으로 이 과학자의 틀에만 따라 간다면 영원히 그를 뛰어넘을 수 없으며 새로운 돌파가 있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의 발견이나 혹은 발명이 그들이 내린 정의의 틀을 초월하게 되면 그들이 내린 그런 정의는 사람을 제한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더욱 높은 층차에는 또 더욱 높은 인식이 있고, 더욱 높은 이치가 있기 때문인데, 마치 우리가 물질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이전에 사람들은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입자는 원자핵이라고 인식했다. 그러나 지금은 원자핵이 아니라 쿼크, 또 중성미자라 생각하는데, 사람은 끊임없이 이런 것을 인식하고 있다. 하나의 정의를 내리고 난 후 다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면, 먼저 내린 정의는 또 일종의 틀로 되는데 바로 이러하다. 사실 정의란 흔히 사람을 제한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인이 아니다. 그는 종교, 신학(神學)에서 말하는 것이 맞는 것을 발견했다. 왜냐 하면 물질세계에 대한 인류의 인식은 다만 인류지식의 범주 내로 제한되는데, 마치 지금 내린 과학정의와 같기 때문이다. 사람이 정말 계속하여 아래로 연구해 내려가, 더 아래로 발전해 간다면 종교에서 한 말이 맞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높은 한 층의 생명은 더욱 높은 한 층의 과학기술을 대표하는바, 그가 장악한 과학기술은 세상에 대한 인식에서 속인을 벗어나 있다. 이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이 이미 인류과학기술이 인식하는 최정점(最頂點)에 이르러 계속 연구해 나가 종교에서 한 말이 전부 진실인 것을 발견하게 된 원인이다. 근대에 많은 과학자, 철학자들은 마지막에 모두 종교로 들어갔는데 모두 아주 성취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현재 목전의 과학수준의 틀과 미신적인 것에 굳어진 사람들은 일률적으로 모두 봉건미신이라고 말해 버린다.

만법귀종(萬法歸宗)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는 이 한 마디 말, 그것은 그들 자신의 법문 중에서 한 말이다. 도가는 3천6백 법문이 있는데 모두 도(道)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불가는 8만 4천 법문이 있는데 그는 모두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한다. 만일 얼마나 되는 교가 모두 같이 수련한다면 그것은 전혀 그런 일이 아니다. 사람이 어찌 천상의 일을 알겠는가, 순전히 함부로 하는 짓이다.

옛날 중국에는 『일관도(一貫道)』라는 것이 있었다. 당시 청나라 말기에 나타났을 때 일관도는 오교동당(五敎同堂)을 주장했다. 자체가 바로 사교(邪敎)이므로 청대(淸代)에 그것이 나타나자마자 대청황제(大淸皇帝)가 그것을 죽여 버렸다. 민국(民國) 초기에 국민당도 그것을 죽여 버렸는데, 한 무리 한 무리 총살했다. 공산당이 해방하였을 때도 역시 한 무리 한 무리 죽여 버렸다. 무엇 때문에 이런 정황이 나타나는가? 실제적으로 속인사회에서 나타나는 일체 일은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니다. 역사의 발전은 천상(天象)의 변화를 따라가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속인사회에 출현하는 어떠한 사건이든 그것은 모두 누구의 머리가 화끈 달아올라 곧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바로 속인이 일관도를 죽인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天意)으로서, 위에서 그것을 죽이고자 한 것으로 그것이 존재함을 허용하지 않았다. 무슨 오교동당(五敎同堂)을 하다니, 이는 심한 난법(亂法)이다. 이는 마(魔)가 한 짓이 속인 중에서 표현된 형식이다.

원시천존(元始天尊), 석가모니부처 그도 감히 불도합일(佛道合一), 동당(同堂)을 말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될 말인가! 불교 중에서는 또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주장한다. 정토(淨土)를 수련하는 사람은 선종(禪宗)을 섞어서 수련할 수 없으며 두 가지를 섞어서 수련할 수 없다. 선종을 수련하는 사람은 천태종, 화엄종을 섞어서 수련할 수 없으며 다른 것을 섞어서 수련할 수 없다.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공(功)의 연화(演化)는 극히 복잡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신체가 하나뿐인데 예를 들어 당신이 일종 원료로서 이 한 대의 기계에 올려놓는다면 당신의 공은 바로 이 한 대의 기계 위에서 연화된다. 당신을 제도하는 방법과 매 한 단계를 어떻게 걷는가와 매 공의 연화(演化) 형식을 모두 당신에게 매우 주도면밀하게 배치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중도에 당신을 또 다른 한 대의 기계에 올려놓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도 수련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 될지 당신이 말해 보라. 뒤죽박죽이 된 한 무더기 폐물이 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수련하여 올라가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난잡하게 수련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부처가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말한 진정한 함의는 바로 섞어서 수련할 수 없다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불이법문을 잘못 이해했으며 다른 뜻으로 이해했는데 이것은 절대 섞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관도(一貫道)』는 오교합일(五敎合一)을 주장하는데 하늘의 이치(天理)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대만에 또 나타났다. 말법시기는 관여하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말법시기는 본래 관할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갈수록 더 타락하여 누구도 다 손을 뗐으며 아무도 관여하지 않고 제도하지 않는다. 부처를 믿고 부처를 모시는 사람은 고생스럽게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횡재하고, 재난을 제거하기 위함인데 이런 지경에까지 도달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말한 것이 아직도 이치가 있다고 여기는데 실제적으로는 종교를 믿는 사람을 포함하여 수련하는 사람의 의념 역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어떤 수련법은 전적으로 믿음(信)에만 의지하고 다른 수법이 없는데 당신이 의념 중에 다른 것을 섞으면 자신이 수련하는 것들을 난잡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 무슨 동작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인류 도처는 모두 마(魔)로서 인류를 타락시키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다 선념(善念)이 있지 않은가? 마(魔)는 바로 이것을 파괴하며 당신으로 하여금 수련 성취하지 못하게 한다.

선종(禪宗)은 극단적이다

사람은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주로 극단적인 것과 중용(中庸)적인 것이다. 선종은 시작부터 극단적이어서 하나의 수련체계를 이루지 못했다. 역대로 선종의 수련에 대해 모두 논쟁이 있었다. 비록 선종의 방법에 따라 수련했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은 부처수련을 하며 선을 향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줄곧 모두 석가모니부처가 관할했으며, 그것들 자신은 하나의 체계를 이루지 못했다. 달마는 자신의 천국이 없기에 사람을 제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달마 그 시기는 여전히 석가모니부처를 조사(祖師)로 여겼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선종이라고 불렀지만 여전히 석가모니부처의 28대 제자였으며, 여전히 석가모니부처를 아주 숭배했다. 석가모니부처의 이론을 에워싸고 해석하면서 중점적으로  『무(無)』를 깨달았는데 여전히 석가모니교의 이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선종은 후에, 갈수록 쇠퇴했다. 훗날 사람들은 달마를 단독적인 한 법문이자 가장 높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가장 높은 것이 아니다. 사실 선종은 한 세대가 한 세대만 못했는데 달마 자신도 단지 6대까지 지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달마는 석가모니부처가 말한 무(無)’에 대한 인식을 비교적 중히 여겼으며, 여전히 석가모니부처를 크게 숭배했는지라 28대 제자로 불렸다. 그러나 뒤에 온 사람은 완전히 이 극단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극단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곧 나쁜 지경에 다다르게 되는데, 달마를 석가모니부처와 거의  동등하게 생각한다. 달마를 숭배하고 달마의 이론을 유일한 불리(佛理)로 여기는데 이는 그야말로 기로로 잘못 빠져들어 간 것이다.

달마는 수련한 것이 매우 낮기에 그 해 그는 겨우 나한과위(羅漢果位)에 도달했는데, 그 역시 나한에 불과하다. 그가 얼마만한 것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끝내 여래 층차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와 석가모니부처의 층차 차이는 얼마나 크겠는가! 그리하여 달마의 것은 속인의 철학에 가장 근접해 있어서 속인으로서는 그의 이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쉬운 것이다. 특히 종교를 일종의 철학으로 삼고, 일종의 정치로 삼는다. 불교의 철리(哲理)를 일종의 학문으로 삼아 연구하는 사람이, 달마의 이론을 불학(佛學)으로 간주하여 연구할 때, 가장 쉽게 그의 이론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속인 중의 철학과 아주 비슷하다.

얼마나 높은 층차이든 부처는 역시 있다. 닦고 닦아 무엇이나 다 닦아 없애버렸다. 수련을 논하면서 그는 심지어 사람조차도 감히 인정하지 않고,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이 여기 보이는데도 인정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런 오성(悟性)이 좋지 못한 속인이 말하는, 보이면 믿고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것보다도 못하다. 그들은 보이는 것조차도 인정하지 않는다. 살아선 뭘 하나? 눈을 떠선 뭘 하나? 눈을 감고 누울 것도 없고, 서 있을 것도 없으니……, 아무것도 없다. 바로 극단으로 나갔기에 달마마저도 그의 법은 6대까지만 전해질 수 있다고 했다. 지금의 사람은 이 이치를 아직도 꽉 부둥켜안고 있다. 본래 존재하지 않는 이치인데, 아주 가소롭게도 막다른 골목으로 나아갔다.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부처를 인정하지 않으며 지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자기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데 이름을 붙여서는 뭘 하는가? 밥을 먹어선 뭘 하는가? 하루 종일 굶고, 시간 볼 필요도 없고, 소리 들을 필요도 없고…….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도 아무것도 없는데 이것은 석가모니부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닌가? 석가모니부처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면 그럼 그는 49년 동안 무얼 했단 말인가? 석가모니부처가 말한 공(空)의 진정한 함의가 무엇인지 아는가? 석가모니부처가 법(法)을 남겨놓지 않았다고 함은, 그가 진정으로 수련하는 방법과 우주의 법(法)은 말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가 말한 것은 그 자신이 수련한 층차의 것에 불과할 뿐이며 속인에게 남겨 놓은 여래법(如來法)은 주로 수련에 대한 경험과 교훈이었다. 석가모니가 세상에 있을 때 진정으로 남겨놓은 법은 계율(戒律)이며 역시 부동한 층차 중의 일부 인식을 말했는데 이것 역시 한 층의 법(法)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부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층차 중에 함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일생에 어떤 법(法)도 말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말한 법(法)이 최고의 법(法)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래는 부처이지만, 그러나 그는 가장 높은 층이 아니다. 불법은 끝이 없다(佛法無邊). 수련자는 그가 말한 법(法)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 대근기(大根基)의 사람은 더욱 높이 수련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더욱 높고 깊은 인식과 법(法)의 체현이 있을 수 있다.

수련과정 중의 층차

수련의 층차는 수련 중에 있는 일부 사람이 수련과정 중에서 알 수 있지만, 수련하는 사람이 반드시 아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개오(開悟)한 후거나 혹은 世間法(쓰젠파) 이외의 높은 층차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알게 된다. 알 수 있는 사람은, 인체에서 내보내는 공(功)의 색상으로 층차를 보아낼 수 있고, 공기둥을 보거나 인체를 보고도 알아낼 수 있다. 世間法(쓰젠파)에서 수련할 때 사람에게서 맨 처음 나오는 공은 붉은색이고, 제고되면 등(橙)색이며, 그 다음은 황색, 녹색,……, 도합 아홉 가지 색으로 적(赤) 등(橙) 황(黃) 녹(綠) 청(靑) 남(藍) 자(紫) 유색(有色) 무색(無色)이다. 당신이 어느 층차에 있는지는 척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다. 투명체에 이르러 더 위로 수련하면 바로 世間法(쓰젠파)수련을 벗어나게 된다. 이미 과위(果位)를 얻은 것으로서 바로 초과나한법(初果羅漢法)수련에 들어선 것이다. 出世間法(추쓰젠파) 수련은 삼계(三界)를 벗어났으며, 다시 속인 중으로 윤회하지 않는다. 만약 여기까지 수련하여 결속된다면 그는 곧 나한이다. 더 위로 수련하면 바로 정과나한(正果羅漢)이고, 색상도 있다. 그러나 이 적 등 황 녹 청 남 자는 世間法(쓰젠파)의 것과 같지 않다. 世間法(쓰젠파) 수련은 아주 짙은 것으로 마치 속인 중의 색깔과도 같다. 出世間法(추쓰젠파) 층차에 이르면 그것은 투명한 적 등 황 녹 청 남 자 유색 무색이다. 더 위로 수련해도 여전히 아홉 가지 색상이며 색이 더욱 투명하고 더욱 부드러우며 더욱 멋지다. 이렇게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느 일보(一步)까지 수련되었는지 보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속인으로 하여금 그렇게 뚜렷하게 보지 못하게 하는 그것에는 바로 하나의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수련한 것을 모두 사람의 신체(人身) 표면에 드러나게 한다면 그럼 또 무엇을 깨닫겠는가? 누구나 다 수련하고 누구나 다 하는데 이래도 배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두 진짜인데. 십악불사(十惡不赦)한 사람, 몹시 좋지 않은 사람마저도 배울 것이다. 그러면 곧 오성 문제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수련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내가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다면 배우겠다.”고 한다. 그것은 안 된다. 만약 이 사람이 무엇이든 다 보아 분명하게 알고 있다면 이 사람은 결단코 더는 수련할 수 없고, 그가 수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이 미혹 속에서 깨닫는 것만이 비로소 수련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백분의 백 개오(開悟)에 도달하여 무엇이든 다 보았다면 이 사람은 수련할 수 없다. 무엇 때문인가? 그가 더 수련한다 해도 인정하지 않는데, 그는 이것이 진짜임을 다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모순이 있을 때의 인연 관계를 보았고,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에게 德(더)를 주게 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어떤 진상(眞相)이든 다 볼 수 있기에 당연히 수련할 것이다. 그것을 그래 수련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냥 가지는 격이다. 속인의 마음을 제거할 수도 없다.

사람은 모순 중에서 속인의 그 마음을 제거하면서 그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만약 그가 모든 것을 다 똑똑하게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수련이라 할 수 없다. 부처는 무엇 때문에 층차를 더 제고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운가? 그는 모순이 없고, 무엇이나 다 똑똑히 볼 수 있기 때문으로, 그가 어찌 수련하겠는가? 수련하기가 더욱 어렵다. 그래서 모두 속인 중으로 와서 수련하려고 한다. 미혹 속에서 수련해야만 비로소 아주 빨리 제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련 중 조금 보게 되는 이것은 가능하다. 물론 상세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한다.

사람이 수련한다 함은, 시작에서 마지막까지 깨달음 하나로 일관한다는 것인데, 미혹 속에서 닦는다. 서방에서는 믿음을 말하는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믿음을 말하며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다. 당신이 믿기만 하면 그는 당신으로 하여금 감응(感應)하게 해준다. 어떤 사람은 예수의 상 앞에서 참회할 때, 머릿속으로 정말 예수가 듣고 있으며, 정말 어떤 사람이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처럼 느낀다. 서양의 수련방법은 바로 이러하다. 종교 신앙 역시 일종 수련이다. 예수는 신도(信徒)를 받아들여 천국으로 가는데, 사람의 신체에 만약 공(功)이 없고 에너지가 없다면 하늘로 올라갈 수 없다. 더욱이 속인 중에서 형성된 나쁜 사상과 몸에 있는 업력은 고층우주특성의 제약을 받게 되는바, 아주 나쁜 사람은 형신(形神)이 전부 흩어져 아무것도 없게 되는데, 그것이 될 말인가. 그러므로 공(功)이 없으면 안 된다. 그 공은 바로 믿는 과정과 참회하는 과정 중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제고하여 좋은 사람이 될 때, 그의 저쪽에서 그에게 연화(演化)해 준 것이다. 비록 그의 공이 자라더라도 그에게는 알려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할 뿐 공은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상 역시 이러하다. 그는 연공하지 않는데, 어떻게 공이 자라날 수 있는가? 바로 그에게 공이 있음을 알려주지 않아도 그 역시 공이 자라고 있다.

불(佛)과 도(道)

도가(道家) 수련은 혼자서 하는 것인바, 도교(道敎)란 마땅히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도교는 실제상 근대에 개량된 산물이다. 역사상의 각 사전(史前)시기에는 모두 도교가 없었다. 왜냐하면 도가는 중생을 널리 제도함(普度衆生)을 말하지 않고, 단독수련을 말하며, 청정(淸靜)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가는 진(眞)을 깨닫는데 眞(쩐)·善(싼)·忍(런)에서 전문적으로 그 진(眞)을 깨달아 수련하며, 수진양성(修眞養性)하여 반본귀진(返本歸眞)한다. 도(道)는 조용히 수련함(淸修)을 주장하기 때문에 중생을 널리 제도하려는 소원이 아예 없다. 수련 성취한 후에는 곧 흩어져 떠돌아다니는 신선으로 된다. 천상에도 산천이 있는데, 그는 천상의 어느 산에 머물러 있다. 사실 도교의 출현은 여전히 속인의 그런 집착심이 조성한 것이다. 사람은 세력이나 단체를 만드는 것을 아주 좋아 하는데, 사람은 모두 이런 공리심(功利心)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을 하기가 아주 쉽다.

사실 도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제자를 가르침은 단독수련이다. 도교를 만들어 제자가 아주 많다 해도 모두 진수를 전해 받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제자가 좋은가를 보고 하나를 골라 진수를 전하는데 좋은 제자가 없다면 그는 자유자재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왜냐하면 그는 도(道)를 얻어 아주 유유자적해졌기 때문이다.

불(佛)은 불(佛)이고 도(道)는 도(道)이다. 그들 양가의 이치를 한데 용해시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연마하는 이것은 실로 너무나도 크다. 우주에 따라 연마하며 일체를 포괄한다. 우리의 기점(基點)은 불가에 있고 주요 이론이나 특징은 모두 불가의 것이다. 하지만 이 법은 불(佛)을 벗어났으며 도(道)를 벗어났다. 부동(不同)한 층차에는 부동한 이해가 있으며 부동(不同)한 층차에는 부동한 현현(顯現)이 있다. 法輪世界(파룬쓰제) 안에서 그는, 그의 인식이 있고, 法輪世界(파룬쓰제)를 벗어나면 더 높은 인식이 있으며, 더 벗어나면 더욱더 높은 인식이 있다.

또 한 층의 것이 있는데 바로 원시신(原始神)이다. 이는 오늘날 수련하는 사람들에게는 말해봐야 소용이 없는 불가사의한 것으로 이 경지에까지는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곧 불도(佛道) 양가(兩家)만 이야기한다. 너무 높게 말하면 안 되는바, 사람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람이 아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람을 제도함에 설법하지 연출을 하지 않는다

속인으로서 수행하는 화상, 특히 개오(開悟)하지 못한 화상과 진법(眞法)을 논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개오한 그런 화상은 또 세간(世間)에 있지 않고, 그들 스스로 심산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다 나를 알고 있는데 오직 속인들만 모르고 있다. 많은 고인(高人)들이 다 나를 알고 있다. 그들은 어떤 때 몰래 와서 보고는 바로 간다. 또 어떤 사람은 다가와서 몇 마디 말을 건네곤 한다. 당신은 그가 심산수림 속에서 몇백 년, 몇천 년 이상을 수련해 왔다고만 보지 말라. 그의 수련은 그리 높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걸어온 그 한 갈래의 길은 아주 간고(艱苦)하지만 그는 대도(大道) 중에서 수련한 것이 아니라 소도(小道) 중에서 수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주 오랜 시간 수련했어도 정과(正果)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세간(世間)으로 들어가지 않았기에 공능(功能)을 잠가두지 않아 그는 신통이 크게 나타날 수 있다. 세간(世間)에서 하는 수련은 흔히 큰 공능을 모두 잠가 버린다. 잠그지 않으면, 생각만 해도 고층 건물이 자리를 바꾸게 되는데 그러면 안 된다. 속인의 상태를 파괴함은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가 높이 연마(煉)했다고 생각한다. 속인은 곧 누가 재간을 피울 수 있으면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를 높게 본다. 그런 기공사들이 연출하는 것은 모두 소능소술(小能小術)이라 작기가 가련한데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속인은 아주 높다고 여긴다.

내가 법을 전함에 어떤 연출(表演)도 하지 않는 뜻은 바로 내가 나온 목적을 설명할 때 이미 분명히 말했다. 만약 한편으로 연출하면서 한편으로 법(法)을 전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법(邪法)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은 법(法)을 배우러 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기술을 배우러 오게 된다. 석가모니부처도 그 당시 이렇게 하지 않았다. 병 치료는 할 수 있는데 정작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그는 나았음을 느낀다. 어떻게 치료했는지 믿고 안 믿고는 당신에게 달렸다. 환자가 나았는데 믿고 안 믿고 아프고 안 아프고를 제3자는 모른다. 이 속에는 또 오성(悟性)의 문제가 있지만, 병 치료는 괜찮다. 그 당시 예수, 석가모니부처도 역시 이렇게 했다. 노자만은 하지 않았는데 노자는 인간이 너무나도 험악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총망히 『5천언(五千言)』을 쓰고는 관(關)을 나가 서쪽으로 가버렸다.

인류사회는 몹시 복잡한 것이라 지상(地上)의 사람을 봐서는 어느 공간에서 왔는지 말하기가 어렵다. 그 공간의 신(神)은 여전히 그를 관리하려고 한다. 그가 깨달을 수 있는가를 보는데, 그가 깨닫는다면 되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신(神)도 그 사람은 안 되며, 이미 어떻게 관리해 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또 그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 해에 예수가 나와서 사람을 제도할 때 그 공간의 신(神)은 곧 그들의 일을 교란한다고 여겼다. ‘이 사람은 내 것으로 이 사람을 마땅히 나의 그곳으로 제도해야 하지 않는가.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 여기까지 와서 상관하는가?’ 하며 그는 곧 말을 듣지 않았다. 바로 이 마음 때문인데 사실 옳지 않다. 그러나 예수는 당신의 것이거나 그의 것이거나 상관하지 않고 사람을 제도하는 것이 온 목적이었기에, 그는 중생이 고통스러운 것을 보고 제도하려 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올라가게 했다. 그리하여 예수는 곧 각개 공간의 많고 많은 신(神)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최후에는 모순이 아주 크게 격화되어 속인사회에까지 반영되었고, 마치 속인사회 중의 모순처럼 되어 모두 예수 거기로 격화되었다. 예수 자신으로서는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오직 죽는 수밖에 없어 십자가에 못 박혀 그들 사이의 원한(怨)을 풀었다. 속인의 육체를 없애버림으로써 다시는 그를 찾아 원한을 맺을 수 없게 하였는바, 그런 무수한 시끄러움이 곧 풀리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가 중생을 위해 수난을 당했다고 말하는데 바로 이런 뜻이다.

석가모니부처가 법(法)을 전하는 것 또한 아주 고생스러웠다. 그는 줄곧 인도의 일곱 가지 종교와 투쟁했다. 당시 원시 바라문교(婆羅門敎)는 아주 대단했다. 마지막에 석가모니부처는 그가 진정으로 도달하려는 목적에는 도달하지도 못하고 가게 되었다.

노자는 『5천언(五千言)』을 쓰고는 곧 갔으며 후세인들로 하여금 실천하게 했다. 하지만 이 역시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이것도 하늘의 뜻이다. 왜냐하면 도가는 종교를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도가가 종교를 설립함은 잘못이기 때문이다. 도가는 단독전수를 하며 진을 수련하고 청정하게 수련하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의 도제(徒弟)는 모두 단독전수하는 것이다. 그가 도제를 선택함에, 좋은 사람을 선택하여 전하기 때문에 그는 중생을 널리 제도할 수 없다. 그는 이런 소원이 없이 진(眞)을 수련한다. 당신이 도관(道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보지만 그는 오직 한 사람만을 선정하여 전하는데 나머지는 모두 형식이다. 그러므로 도가에는 종교가 있지 말아야 한다. 이전에는 줄곧 산속에서 단독수련을 했다.

공자가 말한 것은 사람이 되는 도리이지 수련을 말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것은 역시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득을 보게 했다. 중용사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불패(不敗)의 경지에 있게 한다. 왜냐하면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정상에 도달하게 되면 되돌아 내려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中)’을 구하여 영원히 중간 상태에 놓여 있게 한다. 위로 올라가지는 못하지만 아래에 비하면 아직 여지가 있으므로 영원히 불패(不敗)에 놓여 있게 한다. 무슨 일이든 너무나도 절대적으로 하면 곧 반면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은 속인에 대한 것이다.

심산수림에서 수련하는 많은 사람들은, 역사상 출현한 것과 장차 출현하게 될 하나하나의 사건을 모두 보아냈지만, 어느 누구도 상관하지 않으며, 그들은 누구도 상관하려 하지 않는다. 상관하지 않는 원인은 천상(天象)의 변화가 조성한 것임을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든 하늘의 뜻을 어기고 행(行)한다면 모두 벌을 받게 되기에 누구도 감히 어기지 못한다. 사람들은 모두 악비(岳飛)가 좋다고 하지만 악비는 무엇 때문에 남송(南宋)을 지켜내지 못했는가? 악비 가문(岳家)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는가? 이는 바로 하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악비는 줄곧 송조(宋朝)를 지키고자 했지만 그는 해낼 수 없었다. 실제로 하늘의 뜻을 어기고 행했기 때문이다. 바로 송조(宋朝)가 마땅히 멸망해야 하는데 그가 그것을 망하지 않게 하려고 했기에 그는 바로 하늘의 뜻을 어기고 행한 것이다. 즉 이 뜻을 말할 뿐이다. 사람의 타산은 하늘의 타산만 못하다. 여기에서 악비가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속인 각도에서 옳다고 여기는 일이 꼭 옳은 것은 아니다. 진시황(秦始皇)이든, 한무제(漢武帝)든, 어느 황제가 무슨 일을 했든지 후세사람들은 모두 이 황제에 대해 평가를 내린다. 속인은 자신의 각도에 서서 자신의 고유한 관념으로 인식하는데, 좋고 나쁘다고 여기는 것이 꼭 진정으로 좋고 나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표준은 자기를 중심으로 한 것이기에, 그가 나에게 좋게 대하면 나는 그를 좋다고 말하고, 나에게 유리하면 나는 곧 좋다고 말한다.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표준은 오직 우주의 특성에 따라, 법(法)에 따라 가늠해야 한다. 그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으로 우주의 이치이며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유일한 표준이다. 진시황은 많은 사람을 죽이고 중국을 통일했다. 많은 나라의 황제들을 다 죽였기에 누구든지 다 그를 욕한다. 각 국가의 황제와 사람들은 모두 그의 통치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누구나 모두 그를 증오하며 누구나 그를 욕했다. 그렇다면 모두가 자신의 각도에 서서 좋고 나쁨을 가늠한 것이다. 그가 중국을 통일함은 필연적이다. 그것은 모두 하늘의 뜻이 조성한 것이다. 만일 하늘의 뜻에 따라서 한 것이 아니라면 그도 해낼 수 없으며 통일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속인 중의 일은 단지 그런 일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 수련하는 사람은 종래로 논평(評論)하지 않는다. 수련하는 사람은 정치에 대해 관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정객(政客)이지 수련이 아니다.

인류는 어느 시기에 이르면 업력이 아주 커져서 곧 십악불사(十惡不赦)하게 된다. 업력이 너무 크면 스스로 깨끗이 갚을 수 없게 되며, 생생세세로 쌓아온 많은 업을 모두 갚기가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곧 훼멸(銷毁)해야 한다. 훼멸한다는데 어떻게 훼멸하는가? 인류에게 작은 겁난(劫難)이 출현토록 하여 사람을 훼멸한다. 전쟁은 가장 편리한 방법이며, 역사는 바로 이런 것이다.

매 한 세대(世)의 개국 황제는 모두, 세상에 나와 그들을 보위하여 전쟁을 치르는 일부 무령(武靈)을 갖고 있다. 이런 무령 자신은 이런 것을 전문으로 하기에 그는 고생해도 공(功)은 없지만 업력을 갖지는 않는바, 바로 이러한 일을 한다. 유유(悠悠)한 만세(萬世)에 미혹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부처는 사람을 제도하지 보우(保祐)하지 않는다

불가에서는 원래 사람에게 돈을 벌라고 말하지 않는다. 병은 업력의 소치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라고 알려 주지도 않는다. 석가모니교가 중생을 널리 제도한다 함은 사람을 속인의 고통스러운 환경 중에서 열반(涅槃)의 피안(彼岸)으로 제도함을 말한 것인데 이는 석가모니부처가 한 말이다. 바로 당신을 천국에 가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가 말한 것도 이 뜻으로 누가 높고 누가 낮음을 논할 수 없다. 다만 현대화한 사람이 깨닫지 못하고서, 부처는 능히 사람을 보우(保祐)하고, 병을 제거하며 돈을 벌게 할 수 있고, 대각자는 위력이 무궁하여 사람을 제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속인은 부처가 사람을 제도하는 것을, 사람에 대한 보호로 간주하기 때문에, 곧 부처에게 자신이 돈을 벌도록 보우(保祐)해 주기를 빌고, 병을 제거해 주기를 빌며 어떠어떠하게 해달라고 한다. 사실 부처는 이런 일을 아예 상관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대의 패괴(敗壞)한 인류관념이 만들어낸 패괴한 인식이자, 변이(變異)이다. 불경에는 본래 이런 내포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늘 이 문제를 이야기한다. 당신이 향을 피우며 돈을 벌게 해달라고 부처에게 빌어도 부처는 당신이 돈을 벌든 말든 전혀 관여치 않는다.

당신이 부처에게 빌어도, 그 부처는 당신이 어떤 식으로 돈을 벌든 아예 관여하지 않으며, 반대로 당신으로 하여금 그런 탐욕스러운 마음을 버리도록 한다. 만약 생활이 정말로 곤란하다면 그 역시 당신의 안전을 보증하기 위해 물질적으로 편의를 제공하지만, 그는 당신에게 재산이 없다고 돈을 벌게 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병에 대해 말하면, 부처는 전생에 진 빚이 지은 업으로 여긴다. 어떤 사람은 불상에 대고 절을 하면서 돈을 벌게 해 달라고 비는데, 결국 정말 돈을 벌었다. 실제로 어떻게 해서 돈을 벌었는가? 그 불상에는 부처가 없고, 빌어 나오게 된 가짜 부처가 있다. 또 어떤 것은 여우가 올라가 붙은 것이 있고, 뱀이나 족제비 같은 난잡한 것이 붙은 것도 있다. 그것들이 당신을 도와 돈을 벌게 해주는데, 당신이 그것들에게 절을 하고, 그것들에게 빈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당신을 도와 돈을 벌게 함은 목적이 있다. 이 우주 중에는 하나의 이치가 있는데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들은 이 이치의 틈을 타 사람의 몸을 얻으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돈을 벌게 해달라고 비는데, 벌게 해줘라! 만약 그 사람의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좋지 않으면, 그것들은 당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바, 돈을 벌려 해도 벌 수 없으며 헛되이 절만 하게 된다. 그것들이 당신의 몸에 좋은 것이 있다고 느끼면, 그것들은 곧 당신으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한다. 그런 다음 당신의 좋은 것을 가져갈 것이다. 당신이 돈을 구하면 그것들은 당연히 당신에게 준다. 하지만 사람 자신은 모르는데, 잃어버린 손실은 아마 영원히 다 만회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한 생뿐만이 아닌지라, 내세(來世)는 아마 더욱 비참할 것이다!

인류의 타락과 위험한 관념

중국 고대에 당신이 수도(修道)를 말했다면 사람들은 곧 이 사람은 정말로 선근(善根)이 있다고 했을 것이다. 당신이 불도신(佛道神)을 말했다면 사람들은 모두 당신이 정말로 괜찮다고 했을 것이다. 오늘 당신이 수불(修佛)과 수도(修道)를 말하면 사람들은 당신을 비웃을 것이다. 사람의 도덕관념에는 거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사람의 도덕관념은 일일천리(一日千里) 아주 빠른 속도로 타락하고 있다. 그렇게 관념마저 타락했으면서도 도리어 고대 사람이 우매하고 미신적이라고 한다. 사람의 관념은 아주 무섭고도 두렵게 변했다. 특히 석가모니부처는 “말법시기 이 사회에 일어나는 변화는 정말 무시무시하다.”라고 했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현재 이 사회에는 사람에게 심법(心法)의 구속이 없는데 특히 중국이 그렇다. 외국도 마찬가지지만 단지 표현형식이 같지 않을 뿐이다. 중국대륙의 ‘문화대혁명’은 사람의 이른바 낡은 사상관념을 타파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공자가 말한 것을 믿지 않게 했다. 사람은 도덕적 구속이 없어졌고 도덕규범이 없어졌으며 또한 종교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들도 나쁜 일을 하면 보응(報應)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당신이 말해 보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신을 구속하는 이런 심법이 없다면, 이 사람은 무엇이든 다 감히 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행동하지 않겠는가? 이는 현재 인류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일부 외국인들은 중국에 와서 사업을 하지 못한다. 더욱이 그런 젊은 사람들은 툭하면 죽이고 찌르고 하는데, 이는 정말 큰일이다. 현재 외국에 비해 중국은 더 심하다. 특히 외국의 갱 영화나 텔레비전이 대륙에 전해올 때 대륙 사람들은 모두 홍콩과 다른 국가가 그렇게 혼란하다고 여긴다. 사실 이런 것이 아니며 그것은 다만 자극을 바라는 관객들의 마음을 끌기 위해 과장한 영화일 뿐이다. 사실 외국은 국내 사람보다 자질이 높고 훨씬 문명적이다. 그런데 국내의 젊은이들은 나쁜 것만 본받고 있지 않은가. 중국이 폐쇄체제로 있었기 때문에 단번에 이런 것을 접촉하게 되자 외국은 모두 이런 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 상하이탄(上海灘) 식의 건달 기업가를 국내에서는 분분히 모방한다. 그러나 그것은 30년대의 옛 상하이(上海)를 묘사한 것이며 또한 예술적인 과장일 뿐, 현실생활은 이렇지 않다. 사람의 관념상에서 홍콩의 갱 영화나 드라마가 중국 대륙에 끼친 영향은 아주 나쁘다. 인류의 도덕관념에 변화가 생겨, 중국에도 동성애, 마약, 마약 매매, 마피아, 성해방, 매춘부 등이 출현했는데, 그야말로 큰일이다! 어떤 사람은 촌뜨기가 개화하면 더 무섭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그는 무엇이든 거리낌 없이 한다.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면 두렵지 않겠는가? 더 발전해 내려간다면, 사람은 어떤 모양이겠는가? 관념상에서 좋고 나쁨이 뒤바뀌었다. 지금은 누가 흉악하면 그가 가장 능력이 있다고 숭배하며, 누가 죽일 수 있고 찌를 수 있으면 이것을 숭배한다.

인류 도덕이 크게 타락하고 있는데 전 세계적으로 모두 이렇다. 사람의 관념은 아주 무섭게 변했다. 지금은 아름다운 것이 추(醜)한 것만 못하고 선(善)한 것이 악(惡)한 것만 못하며, 단정하고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만 못하다.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이전에 음악가가 되고 가수가 되려면 훈련을 거쳐야 했다. 가창법을 익히고 또 음악 이론(樂理)도 알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생긴 형상이 아주 사나운 사람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머리카락을 길게 하고, 무대 위에 서서 아…… 하…… 고래고래 외치는데, 텔레비전에서 띄우기만 하면 곧 인기 스타가 되는바, 그 소리는 매우 귀에 거슬린다. 도덕이 부패함에 따라 일부 추악한 것마저 아름다운 것으로 되었으며 온통 미친 듯이 추구하고 있다. 미술작품도 마찬가지로 고양이 꼬리에 먹을 묻혀 마구 그려내는데 이것 역시 작품이라고 한다. 무슨 추상파, 인상파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엇인가? 예전에는 그림이 보기 좋고 아름다울수록 사람들이 더욱 감상하기를 좋아했다. 당신이 말해보라. 이것이 다 무엇인가! 이는 바로 예술가들이 추구한 이른바 인성해방(人性解放)의 결과이다. 인성은 도덕적 행위규범이 없으면 곧장 마성(魔性)의 대발작으로 이어지는데, 이런 상태 하의 사람에게 아름다운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관념이 모두 바뀌고 있다.

이런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인성의 해방을 주장하면서 어떠한 망설임이나 속박도 없이 제멋대로 한다. 불교에서는 도덕적 규범이 없고 마음속에 도덕적인 구속력이 없는 사람이 내보내는 것은 곧 마성이라고 말한다. 지금 이런 문예작품들을 당신이 보라! 속인은 어찌된 일인지 모르지만 사실 모두 마성의 대폭발이다.

상점의 장난감을 보면, 예전엔 인형을 사도 보기 좋은 것이어야 했다. 지금은 추할수록 더욱 잘 팔리는데, 해골바가지요, 마귀요, 심지어 대변의 형상까지도 장난감으로 만들어 팔고 있는데, 무서운 것일수록 더욱 빨리 팔린다! 이것은 사람의 관념이 모두 바뀌어 거꾸로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인류사회에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말해 주어 사람들이 곧바로 명백해질 수 있음은 사람의 본성이 변하지 않았음을 설명한다. 하지만 인류는 필경 이런 위험한 경지까지 미끄러져 왔다. 내가 서방국가에서 강의할 때 동성애를 언급하면서, 당신들 서양인들의 성의 문란함은 그야말로 난륜(亂倫)의 지경에 들어섰다고 말했다. 그들 어떤 사람이 곧 문제를 제기하기를, “동성애는 국가에서 보호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표준은 개인 혹은 한 단체가 인정하여 표준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것은 모두 자신의 관념에 근거하여 한 것이다. 내가 그를 좋게 여기거나 혹은 그가 나를 좋게 대하면 나도 그를 좋다고 말하고, 혹은 이미 하나의 고정 관념이 형성되어 그의 관념이 그를 좋다고 인정하면 곧 그가 좋다고 말한다. 그 집단 역시 마찬가지로 그 집단이익에 부합하거나 혹은 어떤 목적 달성에 유리하면 그것을 좋다고 말하면서 그것들이 존재함에 동의하지만, 그것이 정말 좋은 것은 아니다. 우주의 이치인 불법(佛法), 그는 불변하는 것으로서 인류 및 일체 사물을 가늠하고 정하는 유일한 표준이고,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유일한 표준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당신들의 정부는 동의하지만 당신들의 천주(天主)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매번 이럴 때면 인류는 아주 위험하며, 통제를 잃어버리게 되는데, 지금 이 지경에서 더 발전해 나간다면 당신이 말해 보라. 어떤 상태이겠는가? 석가모니부처는 “말법시기에는 많은 마(魔)가 사람으로 전생한 후 절(廟)로 들어가 법(法)을 어지럽힐 것이다.”라고 했다. 특히 대만의 이름 있는 많은 화상, 거사는 실질상 마(魔)이다. 스스로 교주라 칭하는데, 그들 역시 자신이 마인 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은 오기 전에 일생을 다 배치해 놓고 전세(轉世)하는데, 그것들은 와서 파괴하는, 그것에 따른 인생길을 걷는다. 그러므로 인류사회는 아주 무섭다. 인도에는 일부 아주 유명한 대사(大師)들이 있는데 다수가 구렁이부체이다. 중국의 기공사는 여우와 족제비 부체가 비교적 많고 뱀 부체도 있다. 말법시기는 바로 난잡한 때이다. 일본 옴 진리교(眞理敎)의 두목은 바로 지옥 속의 귀신이 전세한 것으로 마가 인간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사람은 그 속에 있기에, 세속 중에서 이런 문제를 생각할 시간이 없다. 사회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지만 이런 정도까지 패괴되었음을 모르고 있다. 일단 말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란다.

그러므로 내가 이 법을 전하는 것도 일시적으로 머리가 뜨거워져서 전하는 것이 아니다. 또 여러 가지 형식의 교란이 있다. 당신은 바른(正) 것을 전하고 그는 사악(邪)한 것을 전하는데, 어떤 것은 또 바른 사람인 양 가장해 사람으로 하여금 선(善)을 지향케 하지만, 그의 목적은 선을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닌바, 사람들에게는 알릴 수 없는 목적이 있다. 기공은 처음 발전할 때는 좋았지만 지금은 그릇되게 나갔다. 정토(淨土) 한 뙈기 있기가 무척 어렵게 되었다.

말겁(末劫)시의 인류

전 세계의 많은 정교(正敎)조차도 사람을 제도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일부 원시 정교의 경서는 후세인들에 의해 뜯어 고쳐졌으며, 교의(敎義)마저도 후세인들에 의해 곡해(曲解)되어 일종의 학문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불교를 철학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배우고 있고, 현대과학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몽땅 고대 사람의 상상, 발달하지 못한 신화전설로 말해버린다. 화상과 수사(修士)들은 책만 볼 뿐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으며, 사원은 작은 사회로 되어 서로 아귀다툼을 한다. 그들은 부처에게 난을 없애고 돈을 벌게 해달라고 비는데, 집착심이 많기로 속인만도 못한바, 자신마저도 제도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남을 제도하랴! 또 일부 명성이 높은 화상, 도사, 수도사들은 자신들의 관념에 근거하여 임의로 불경에 대한 조그마한 이해 정도로 책을 써서 불경과 성경을 해석하는데, 사람을 기로에 빠뜨린다. 대각자가 한 말은 아주 깊은 내포가 있어 각 층차의 경지 중에서 모두 불법의 지도 작용을 체현해 낼 수 있고, 수련자의 층차를 끊임없이 제고하게 할 수 있기에, 대각자의 원래 말을 고치는 일체 행위는 모두 난법(亂法)이다.

소위 사람이 불경, 성경을 이해하도록 돕는다는 그런 해석은 부처가 한 말의 진정한 내포에 비해 차이가 너무나도 크며, 심지어는 전혀 다른 일이다. 그 한 점을 이해했다 해도 역시 그 속인에 비해 얼마 높지 못한 자신의 층차에서 이해한 것이며, 더욱 높은 층차에 또 어떤 내포가 있는지 그는 전혀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높이로 수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래의 층차에 도달하지 못하고 어떻게 여래가 한 말의 진정한 고층함의(高層涵義)를 알겠는가? 그런 문장은 단지 난법(亂法)만 할 뿐 사람을 제도할 수 없다. 명리(名利)적인 마음의 작용 하에서 쓴 책은, 부처수련을 하는 사람들을 작자의 사상 틀 속으로 끌어가고, 더 심한 자는, 종교는 마땅히 오늘의 사회 요구에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종교의 내포를 개변하려 한다. 불법은 금강불변불괴(金剛不變不壞)의 천리인데, 인류가 불법에 따라 되돌아 승화하는 것에 반하여, 불법을 도덕이 패괴된 인류에게 적응시키려 한다면 죄업(罪業)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책을 써서 불경을 함부로 해석함은 정법(正法)을 심하게 교란하는 것으로 사실 그들은 일찍이 지옥 속에 있다.

사람이 생생세세 나쁜 일을 많이 하여 비할 바 없이 큰 업력을 쌓게 된 것 역시 올바른 믿음(正信)이 생기지 않는 요소이다. 어떤 사람은 전 한 세(世)에 수행(修行)했지만 수련을 잘하지 못하고 각종 집착심을 내려놓지 못했기에, 수련성취하지는 못하고, 조그마한 복을 쌓게 되었다. 다시 한 차례 사람으로 전생하면 흔히 ‘공능’을 가지게 되어, 천목은 아주 낮은 층차 중에서 다른 공간의 정황을 조금 볼 수 있다. 그러면 그런 속인은 각종 명리심의 부추김 하에서 각종 명목의 종교를 세우는데, 표면상으로는 사람에게 선을 지향하라고 가르치지만 내심 깊은 곳에서는 오히려 명리(名利)를 추구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대각자는 자신의 세계(천국)가 있어 그리로 사람을 제도할 수 있지만, 이런 사람들은 어디로 사람을 제도하겠는가? 가짜 기공사 역시 마찬가지로서 일부는 부처가 되려하고, 일부는 자신이 전생에 부처였다고 한다. 또 일부 동물 부체가 있는 사람은, 그 기공사를 무슨 일대 종사(宗師) 등등이라고 치켜세우는데, 가짜 기공사 자신도 마음이 들떠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인다. 모두 인간세상을 어지럽히는 귀신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세간(世間)은 사악(邪惡)에 의해 엉망진창이 되었다. 수천수백 년에 걸쳐 가짜 종교, 사교(邪敎), 또 많은 개량종교가 줄곧 유전하고 있는데,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렵다. 바로 그러한 사교, 무교(巫敎)의 교의(敎義)는 모두 사악한 것임에도 무교의 두목을 믿고 숭배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사람에게 도덕이 없어진 것이 아닌가? 무엇 때문에 마도(魔道)로 들어가게 되는가? 다수는 사람을 해치는 술법을 구하고자 사람을 해치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데, 장래에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지도 않는다. 원시정교(原始正敎)는 말법시기에 들어갔기에 사람을 제도할 수 없고, 만마(萬魔)가 세상에 뛰쳐나와, 난법(亂法)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며, 인류에게는 심법(心法)의 구속도, 도덕의 규범도 없다. 만마(萬魔)의 조종 하에 악한 짓이란 악한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없고 도덕과 함께 기준은 가장 빠른 속도로 타락해가고 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관념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아름다운 것이 추한 것만 못하고, 바른(正) 것이 그릇된(邪) 것만 못하고, 선한 것이 악한 것만 못하며, 단정하고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만 못하고, 새로운 것이 낡은 것만 못하며, 향기로운 것이 구린 것만 못하다고 여긴다.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여자는 머리를 짧게 깎는바, 음이 성하고 양이 쇠(陰盛陽衰)하는 음양반배(陰陽反背)가 일어났다. 미술 작품은 도덕적 규범이 없이 인성(人性) 해방을 추구하는데, 바로 마성(魔性)을 한껏 드러냈다. 무슨 인상파요, 무슨 추상파요 하며, 한바탕 마구 발라 놓은 것이 지금 사람들의 뒤바뀐 관념에 의해 되레 받아들여지는가 하면, 마음 내키는 대로 한 무더기 쓰레기를 모아 놓고 현대파 조소대사(雕塑大師)의 작품이라 하고, 음악작품 중에서는 무슨 『디스코』, 『재즈』 아주 시끄러운 소리를 우아한 자리에 오르게 하며, 목이 쉰 소경, 절름발이, 형상이 혐오스런 사람을 방송이나 텔레비전에서 띄우기만 하면 모두 가수로 되는가 하면, 상점의 어린이 장난감은 더욱 추(醜)하고 더 악한 모양일수록 더 잘 팔린다.

인류가 무정념(無正念)의 심리작용 하에서, 추구하는 것에도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다. 명리(名利)를 위해 살인방화를 하고서도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오로지 돈만 알고 사람을 모르며, 친인마저 인정하려 하지 않는데,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금전으로 옭아맸다. 돈 때문에 천리를 위배(傷天害理)하는 여러 가지 일이 잇따라 나타났다. 성을 문란하게 하는 상품이나 선전물, 녹음테이프, 비디오테이프를 도처에서 볼 수 있고, 돈을 위해 사람을 해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마약을 제조하고 운반하여 팔고, 퇴폐한 마약 중독자는 비싼 마약을 사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훔치고 강탈하며 돈을 사기 치는가 하면, 텔레비전이나 신문잡지 및 작품 중에는 성해방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으며, 인간들은 이미 손위 사람 가림 없이 난륜(亂倫)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추악한 동성애는 이 시기에 이지를 상실한 더러운 심리상태를 나타냈다. 마피아는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도리어 폭력과 마성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시장이 되었는가 하면, 마피아 두목은 숭배하는 우상이 되어 분분히 그에게로 몰려들고 있다.

역사상 많은 대각자, 선지자(先知者)들이 모두 이때에 인류에게 곧 대겁우환(大劫之憂)이 있을 것임을 예언했다. 오늘의 인류는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보다도 더 나쁘다. 사람이 생생세세에 아주 많은 나쁜 일을 하여 비할 바 없는 큰 업력을 쌓았기 때문에, 집을 나서기만 하면 곧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게 되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전생(前世)에 나쁜 일을 하여 진 빚을 갚아 업을 없애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다른 사람이 자기에 대해 좋지 않게 대하면 용서도 인내도 없이 당신이 나에게 좋지 않게 대하면 나는 당신에게 더 심하게 하겠다고 한다. 남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남을 건드리지 않고, 남이 나를 건드리면 나도 반드시 남을 건드리는데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는다. 이전의 업을 갚지도 못했는데 또 새로운 업력을 짓게 되어 신체에는 업력이 많기로 사람이 놀랄 정도다! 인류의 도덕은 급속히 타락해 이미 위험한 지경에 와 있다. 사실 인류 도덕의 대 패괴는 생생세세 사람마다 모두 좋지 않게 부추기는 일을 함으로써 일어난 것이다. 세계에 매번 겁난이 출현할 때는 모두 인류의 도덕이 고갈되었을 때였다. 이것이 바로 말겁 시기의 표현이다.

진수(眞修)

진수(眞修)제자여, 내가 당신에게 가르친 것은 수불수도(修佛修道)하는 법(法)이건만, 당신들은 속인 중의 이익이 손실됨으로 인해 오히려 나에게 괴롭다고 하소연할 뿐, 자신이 속인 중의 집착심을 내려놓지 못함에 대해서는 괴로워하지 않는데, 이것이 수련인가? 속인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이것은 초상적인 사람으로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관이다. 진수제자는 사람마다 모두 넘어야 하는바, 이것이 수련자와 속인의 경계선이다.

사실 당신들이 속인 중의 명(名)·이(利)·정(情)에 해를 입어 괴로워한다면 아직 속인의 집착심을 내려놓지 못한 것이다. 당신들은 기억해야 한다! 수련 자체가 고생스러운 것이 아니라, 속인의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당신들이 명(名)·이(利)·정(情)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될 때, 당신들은 비로소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당신들이 비할 바 없이 아름답고도 성결(聖潔)한 세계에서 떨어져 내려오게 된 것은, 당신들이 그 층차 중에서 집착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비교해 보면 가장 더러운 세계에 떨어지고서도 당신들은 재빨리 되돌아 수련하지 않고, 오히려 또 더러운 세계 속의 그런 더러운 것들을 붙안고 놓지 않으며, 심지어 조금만 손해를 보아도 고통스러워 어쩔 줄 모른다. 당신들은 아는가? 부처(佛)는 당신들을 제도하기 위해 일찍이 속인 중에서 동냥했고, 나는 오늘 또 큰문을 열고 대법(大法)을 전수하여 당신들을 제도하고 있다. 나는 무수한 괴로움을 겪었어도 고통스럽다고 느낀 적이 없는데, 당신들은 또 무슨 내려놓지 못할 것이 있는가? 당신이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을 갖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단 말인가?

명지(明智)

내가 일부 수련생들에게 사상이 과격한 것은 일종 사상업(思想業)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알려주자, 지금 많은 수련생들이 평소 자신에게 나타나는 그리 좋지 못한 일체 생각을 모두 사상업이라고 하는데, 이는 옳지 않다. 당신 자신에게 어떤 좋지 못한 생각도 다 없다면, 당신은 또 무엇을 수련하겠는가?! 그렇게 순결하다면 당신은 바로 부처 아닌가?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자신의 사상 중에서 더러운 생각이 격렬하게 반영되어 나와 스승을 욕하고, 대법(大法)을 욕하며, 사람을 욕하는 등등의, 내버리지도 억누르지도 못하는 이런 것이 바로 사상업력(思想業力)이다. 그러나 또 일부 약한 것도 있으나, 통상 정상적인 사상 염두와는 같지 않으므로 반드시 명확해야 한다.

깨달음(悟)

인간 세상이 혼탁(渾渾)하여 옥석이 뒤섞였구나(珠目相混). 여래가 세상에 내려옴은 필연 은밀하다. 법(法)을 전함에 필연 사문(邪門)의 교란이 있다. 도(道)와 마(魔)가 함께 전해져, 한 세상에 함께 있으니, 진짜와 가짜를 가려냄은 주로 깨달음에 달렸다. 어떻게 분별하는가, 필연 상사(上士)가 있다. 과연 맺은 연분대로 깨달을 수 있는 자들인지라, 잇따라 모여와 입도(入道)하여 법(法)을 얻는구나. 정(正)과 사(邪)를 가려내어 진경(眞經)을 얻고, 그 몸을 가볍게, 그 지혜를 풍부하게, 그 마음을 충실하게 하여 법선(法船)에 오르니 유유하구나. 옳도다! 원만을 이룰 때까지 정진하라.

혼세(混世)에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돈을 위해 살고 권세를 위해 죽는다. 파리 대가리만한 작은 이익을 위해 기뻐하고 걱정하며 고달프게 다투니 일생토록 업(業)을 빚는구나. 이런 사람이 만약 이 법(法)을 들으면 필연 비웃으며 미신이란 두 글자를 뱉어내고, 마음속으로 이해하고 믿기 어려워하니, 이런 사람은 하사(下士)라 제도하기 어렵다. 업이 커서 이미 그 몸을 봉(封)하고, 그 지혜를 닫아버렸으니, 본성이 없구나.

왜 볼 수 없는가(爲何不得見)

보이면 믿고 보이지 않으면 곧 믿지 않는 이것은 하사(下士)의 견해이다. 사람은 미혹 중에서 업을 너무 많이 빚어, 본성이 미혹되었으니 어찌 볼 수 있겠는가. 깨달음(悟)이 먼저이고 보는 것은 나중이라, 마음을 닦고 업을 제거하여 본성이 나와야만 비로소 볼 수 있다. 그러나 상사(上士)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깨달음에 의해 원만을 이룬다. 뭇사람은 보이는 사람도 있고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 층차로 정한 것이며 근기(根基)에 의한 소치다. 많은 수련자들이 보지 못하는 이유는 보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인데 이는 집착이라, 버리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많게는 업력에 의한 저애이거나, 환경이 적당치 않아서거나, 또는 수련하는 방법에 의해 정해진 것으로, 원인은 여러 가지라, 사람에 따라 정해진다. 보이는 자는 보더라도 똑똑치 않을 수 있는바, 똑똑히 보이지 않아야 도를 깨달을 수 있다. 만약 자신이 그 어느 경지에 이른 듯 무엇이나 다 똑똑히 볼 수 있다면 이 사람은 개공(開功)한 것으로 더는 수련할 수 없으며 그 깨달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법을 배우다(學法)

지식인이 대법(大法)을 배움에 주의해야 할 가장 두드러진 한 가지 문제는 바로 대법(大法)을 일반 속인 중에서 이론저서를 학습하는 방법으로 배우는 것이다. 마치 알맞은 명인어록(名人語錄)을 선택해서 자신의 행동을 비춰보며 배우는 것과 같은데, 이는 수련자의 제고에 방해가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대법(大法)에 아주 깊은 내포가 있고, 부동한 층차의 수련을 지도하는 아주 높은 것이 그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서는 한 글자 한 글자씩 파고드는데,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장기적인 정치이론 학습 중에서 양성된 습관 역시 수련에 영향을 주는 일종의 요소로서, 법(法)을 곡해(曲解)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법(法)을 배울 때, 기어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으로 알맞은 부분만을 찾아서 학습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이 역시 일종의 변상(變相)적 집착(모순이 있어서 급히 해결해야 할 것은 포함하지 않음)이다. 대법(大法)을 잘 배우려고 한다면 어떠한 목적도 품지 말고 배워야만 비로소 옳은 것이다. 『전법륜(轉法輪)』을 한 번 읽을 때마다 좀 명백해졌다면 바로 제고한 것이며, 당신이 한 번 보고나서 혹시 단 한 가지 문제라도 명백해졌다면, 그 역시 진정으로 제고한 것이다.

사실 당신은 수련 중에서 바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수련되어 올라온 것이다. 기억하라. 구함이 없어야만 스스로 얻게 된다.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如何輔導)

각지의 많은 보도원(輔導員)은 대법(大法)에 대해 아주 높은 인식이 있어 솔선수범(以身作則)하여 연공장을 아주 잘 조직하였다. 그러나 잘하지 못한 보도원도 있는데 주로 업무처리 면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보도원 일의 편리를 위해 수련생으로 하여금 보도원에게 복종토록 연공장에서 명령식으로 일을 처리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법(法)을 배움은 자원(自願)해서다. 만약 배우는 자 자신이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으며 또한 모순이 나타날 수 있다. 만일 고치지 않으면 모순이 격화될 수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법(法) 배우는 것을 심하게 파괴할 수 있다.

더욱 심한 자는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복종하게 하기 위하여, 늘 일부 골목 소식을 전하거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을 전하여, 자신의 성망을 제고하거나 또는 남달리 독특하게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안 된다. 우리의 보도원은 사부가 아니고 자원적으로 여러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마땅히 이런 집착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보도원 일을 잘할 것인가? 우선 자신을 수련생으로 두어 수련생 위에 있다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일을 할 때 모르는 것이 있으면 겸허하게 여러 사람들과 함께 탐구하고 토론해야 한다. 일을 잘하지 못했으면 진심으로 수련생들에게 말해야 한다. “저도 여러분과 같은 수련자이기에 일을 하는 중 잘못을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일은 제가 잘못했으니, 그럼 바르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일을 잘해 보겠다는 성의(誠意)가 있다면, 당신이 보라,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 누구도 당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당신을 법(法)을 잘 배운 흉금이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대법(大法)이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모두 배우고 있다. 보도원의 일거일동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수련생은 모두 대법(大法)에 대조하여 가늠할 것이며 아주 똑똑히 보아낼 것이다. 자신을 높이려는 생각이 있기만 하면 수련생은 당신의 心性(씬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므로 겸허(謙虛)해야 하며 그래야만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성망(聲望)은 법 학습을 잘 함으로써 수립되는 것이다. 한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잘못이 없을 수 있겠는가?

무엇이 공인가(何爲空)

무엇을 공(空)이라 하는가, 물질이 빈 것이 아니라 집착 없음이 진정한 공이다. 하지만 선종(禪宗)은 이미 법(法)이 끝나 전할 것이 없다. 난법말세(亂法末世)에 어떤 학자는 텅 빈 그 이치만 고집스레 틀어쥐고서, 경박하기가 마치 철리(哲理)의 근본을 깨닫기라도 한 듯하다. 그 조상 달마(達摩)도 스스로 오직 육대지법(六代之法)이라 하며, 후로는 더 전할 수 없다고 했다.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는가. 예컨대, 모두 다 공(空)이라, 무법(無法)·무불(無佛)·무상(無像)·무아(無我)·무존(無存)이라니, 달마는 무슨 물건인가? 무법(無法)이라니, 선종의 텅 빈 이치는 무슨 물건인가? 만약 무불무상(無佛無像)이라면 석가모니는 어떠한 사람인가? 당신은 무명(無名)·무상(無像)·무아(無我)·무존(無存)이라 전부가 공(空)이라니, 밥을 먹고 물을 마셔 무엇을 할 것인가? 옷을 입어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눈을 파면 어떠할까? 당신은 어찌하여 그 속인의 칠정육욕에 그렇게도 집착하는가. 여래가 말하는 공(空)은, 실은 속인의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남은 마음 하나 없음이 공(空)의 참뜻이다. 우주는 본래 물질이 존재하고 형성되고 머무는 곳인데 어찌 빌 수 있겠는가. 여래가 아니면서 법(法)을 전하면 필연코 단명(短命)이라, 이치는 끝나고 존재하지 않나니, 나한(羅漢)의 법(法)은 불법이 아니로다! 깨달을지어다! 깨달을지어다!

견정(堅定)

사부가 있으면 신심(信心)이 충만하고 사부가 없으면 수련할 흥미가 없어지니, 마치 사부를 위해 수련하고 흥미를 위해 오는 듯한데, 이는 중사(中士)의 한 가지 큰 폐단이다. 석가, 예수, 노자, 공자가 떠나간 지 이천년이 넘었지만, 그 제자들은 여태껏 사부가 없어 수련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련이란 자신의 일로서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 사부된 사람은 단지 그 표면적인 법리(法理)만 알려줄 뿐이다. 마음을 닦아 욕망을 끊고 지혜를 밝혀 미혹되지 않음은 곧 자신의 책임이다. 흥미(興)로 오면 마음이 확고치 않은바, 세속으로 들어감에 필연코 그 근본을 잊게 된다. 만약 그 생각(念)을 고수하지 아니하면 일생 얻음이 없을 것이다. 언제 다시 기연(機緣)이 이루어질지 알 수 없으니, 어렵도다!

불교의 논술은 불법의 가장 약소한 일부분이다

중생들이여! 불교로 眞(쩐)·善(싼)·忍(런) 대법(大法)을 가늠하지 말라. 그것으로는 가늠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습관적으로 불교의 경서(經書)를 법(法)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사실 천체(天體)는 너무나 커서 우주에 대한 부처의 인식을 벗어났다. 도가의 태극 역시 작은 층차(小層次)에서 우주를 이해함이라, 속인 이 한 층에 이르러서는 이미 실질적인 법(法)이 없게 되었다. 다만 우주 변두리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좀 수련할 수 있게 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속인은 가장 낮은 층차의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한 불법(佛法)을 알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부처를 공경하면 수련 기연(機緣)의 인과(因果)를 심을 수 있고, 수련하는 사람은 주문을 가지고 고급생명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며, 계율을 지키면 수련인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성인(聖人)의 말씀을 들었다. 역사상 어떤 사람들은 각자(覺者)가 한 말이 바로 불법인지 아닌지 줄곧 연구해 왔다. 여래부처가 한 말은 불성(佛性)의 체현이라, 법(法)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오히려 우주의 실질적인 법(法)이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사람이 불법의 진실한 체현을 아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법이 무엇인가는 고층차로 수련되어야만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한 수련의 본질을 더욱 알지 못하게 하였다. 法輪大法(파룬따파)는 우주의 특성[불법(佛法)]을 만고(萬古)이래 처음으로 사람에게 남겨놓은 것으로, 사람에게 하늘로 올라가는 한 부의 사다리를 남겨놓은 것과 같다. 그러니 당신이 어찌 과거 불교 중의 것으로 우주 대법을 가늠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 지혜인가(何爲智)

인류사회 중의 유명인사, 학자, 각 분야의 전문가를, 사람들은 아주 위대하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모두 아주 보잘것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속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식 역시 단지 속인사회의 현대과학이 인식한 그런 조그마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방대한 우주에서 가장 거시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미시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인류사회는 가장 중간, 가장 외층, 가장 표면에 있다. 생명 역시 가장 낮은 존재형식이다. 그러므로 물질과 정신에 대한 인식 역시 아주 낮고 얕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가련한 것이다. 전 인류의 지식을 다 장악했다 할지라도 역시 속인이다.

퇴직하여 다시 연마(退休再煉)

강의를 들었고 근기(根基) 또한 괜찮은 일부 수련생들이 사업에 바빠서 연마하지 않는데 몹시 애석하다! 만약 일반적인 속인이라면 나도 더 뭐라고 말하지 않으며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 하지만 이 부분 사람들은 희망이 있는 것이다. 인류의 도덕은 일일천리(一日千里)로 타락하고, 속인은 모두 그 물결에 따라 흐르므로, 도(道)와는 갈수록 멀어져 되돌아 수련하기란 더욱 어렵다. 사실 수련이란 바로 사람의 마음을 닦는 것으로서, 더욱이 복잡한 사업환경은 바로 心性(씬씽)을 제고할 좋은 기회인데, 일단 퇴직하게 되면 하나의 좋은 수련 환경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아무런 모순도 다 없다면 또 무엇을 수련하겠는가? 어떻게 제고하겠는가? 당신의 타산이 간혹 좋기도 하나, 사람의 생명은 한계가 있는 것으로, 당신은 자신의 장래에 남아 있는 시간이 아직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가? 수련은 아이들 장난이 아니며 속인 중의 그 어떤 일보다도 더 엄숙한 것으로, 으레 그렇게 되려니 생각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일단 기회를 놓치면 육도(六道) 중에서 윤회하게 되는데, 어느 때에 다시 사람 몸을 얻겠는가! 기회와 인연은 오직 한 번뿐이며, 내려놓지 못하는 몽환(夢幻)이 지나가버리면 비로소 잃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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