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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창작회 설법

 

李洪志
2003년 7월 21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여기에 자리한 수련생들은 모두 미술창작을 하는 사람들로서 모두 전문적인 기능이 있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여러분에게 말하겠는데, 나는 오로지 법리상에서 말한다. 미술은 인류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인류의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인류사회에서 사람의 관념에 대한 일종의 유도 작용을 일으킬 수 있으며, 인류의 심미(審美)관념에 영향을 준다. 무엇이 미(美)이며, 무엇이 인류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정확한 미의 감수인가 하는 이것은 인류의 도덕기준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만약 사람이 아름답지 않은 물건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긴다면 인류의 도덕은 이미 끝난 것이다.

인류의 도덕은 같지 않은 시기에 일부 변화가 발생하였다. 인류의 도덕은 인류의 예술에 영향을 주고, 예술은 역으로 또 인류에게 영향을 끼친다. 여러분들이 보았듯이 오늘날의 예술 중 수많은 것들이 현대의식을 받아들여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류는 이미 인류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도덕의 범위와 표준을 훨씬 벗어났다. 그러므로 만들어낸 소위 예술은 이미 사람의 문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지적이고 청성(淸醒)한 가운데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사람이 정념과 선념(善念)으로 예술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만들어 낸 인류의 진정한 아름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 예술은 타락하고 있다. 현재의 예술에 대해 말하자면, 엄격하게 말해서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다. 나는 항상 일부 소위 현대예술작품을 본다. 매우 명망이 있는 작품들이라지만, 사실 모두 마성(魔性)의 산물이다. 비단 마성의 것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 중 느낌(感覺)을 찾을 때는 이미 귀신의 행위를 추구하고 있는 것인데, 계속 이렇게 해나간다면 심리는 필연 음침(陰暗)하고 괴이(怪異)하게 된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시피, 이러한 것을 할 때의 심리상태는 모두 인성(人性)의 악한 일면을 방종(放縱)하며, 심지어 일부러 사악한 심리반응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이런 소위 현대예술의 것들은 일반적으로 모두 그다지 좋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 대하여 해(害)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감상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심리적인 상해를 입히며, 사람의 도덕관념에 대해서도 엄중한 파괴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제자는 수련과 생활 가운데서 여전히 속인의 이 사회 환경을 이탈할 수 없으며, 여전히 현대인의 관념 이런 조류(潮流) 속에 있으며, 여전히 이런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아주 많은 대법제자들이 대법을 배우기 전에 모두 현대예술을 배우고 취급하였다. 물론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이 현대예술을 하든, 인류에게 마땅히 진정으로 있어야 할 정통예술을 하든, 과거 당신들이 배운 기본기는 역시 같다. 그러므로 대법제자는 반드시 무엇이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예술인가를 똑똑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곧 사람의 순정(純正)한 예술표준에 따라 할 수 있으며, 좋은 것을 창작해 낼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 회의를 여는가?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대법제자가 역사에서 오늘날 한 일은 무엇이든 지극히 중요하다. 내가 어제도 말했듯이, 대법제자가 무엇을 하면 머지않은 인류사회가 모두 따라 배울 것이다. 현재, 정법기간에 세상의 일체가 모두 대법을 둘러싸고 움직이고 있는데, 이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삼계는 정법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오늘 여러분들과 이러한 문제들을 말하려고 하는가? 왜냐하면 이런 분야의 예술기능이 있는 대법제자는 능력이 있고 에너지가 있어 당신들이 해낸 일들이 만약 바르지 않거나 혹은 그다지 바르지 않다면, 당신들은 곧 바르지 않은 그 요소를 강화하여 인류사회에 더욱 영향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련이라, 당신들은 원래 자신을 수정(修正)하고 좋지 않은 일체를 수련하여 제거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어디에서라도 마땅히 모두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예술이라는 이 영역에서도 여전히 좋은 사람이어야 하고 당신의 작품 중에서도 역시 아름다움(美)을 표현해야 하며, 바름(正)을 표현해야 하고, 순수(純)함을 표현해야 하며, 선(善)을 표현해야 하고 광명(光明)을 표현해내야 한다.

인류사회의 도덕이 여기까지 미끄러져 내려왔을 때, 인류의 관념도 이러한 변화가 발생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변화·발전되었다면, 사람이 스스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 어떤 이론, 어떤 방법도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되돌아오게 할 수 없으나, 오로지 대법만이 할 수 있다. 당신들은 나를 따라 중생을 구원하러 왔으며, 동시에 우리가 중생을 구원하는 의의 중에는 인류의 도덕을 구원함과 구원된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미래에 존재하고, 어떻게 생활하며, 어떠한 상태에서 생활하는가도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대법제자는 비단 중생을 구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미래의 중생에게 사람이 생존하는 진정한 한 갈래의 길을 개척해 주고 있다. 이것은 모두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가운데 하는 것이다.

나는 삼계가 앞으로 영원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법정인간시기에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제자가 오늘 하는 어떤 일도 모두 지극히 중요하며, 또한 모두가 미래의 사람과 미래의 문화에 기초를 개창(開創)해 주는 것이다. 근대 인류의 일체는 모두 난잡해졌고,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고만한 정통적인 것조차도 거의 다 없어지다시피 했으며, 순정(純正)한 것은 하나도 없다. 다행히 고인(古人)들이 일부 문화유산을 그나마 남겨두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특히 미술방면에서 일부 기본기(基本功)의 학습을 남겨두어 인류는 그래도 인도(人道)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가운데 미술을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부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장악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장 기본적인 이러한 것들을 운용하여 진정한 사람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어떻게 좋은 것들을 창작해 낼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엔, 기본기(基本功)의 기초가 있고 대법제자가 수련 중에서 인식하게 된 진정으로 선하고 바르며 순수한 아름다움을 더하면 바로 좋은 것을 표현해 낼 수 있다.

여기까지 말한 김에 나는 또한 내가 본 인류의 발전상황과 인류예술의 발전과정을 말하고자 한다.

사실 인류의 동·서방의 예술은 모두 성(成), 주(住), 괴(壞)의 과정이 있다. 동방의 예술과 서방의 예술은 두 갈래 서로 다른 길을 걸었는데, 이것은 사람의 언어로 말한 것이지만, 사실은 두 개의 부동한 우주 대체계(大體系)가 각자(各自)의 가장 낮은 층차의 생명, 즉 사람의 예술생활 방면에서 구체적으로 체현된 것으로서, 다시 말하면 그 우주체계 것들의 가장 낮은 층차 사람 여기의 표현이다. 사실 우주 중에는 수없이 많고 많은 부동한 대궁(大穹)이 있는데, 매우 많으며 모두 독립적이고도 거대한 천체이다. 매개 대궁 중에는 모두 그 독특한 구조가 표현해 낸 각자(各自), 각 방면의 부동(不同)한 풍격(風格)이 있는데, 사람의 언어로 말하면 바로 역시 부동(不同)한 예술특징이 있는 것이다. 매개 거대한 천체는 모두 眞(쩐)·善(싼)·忍(런)의 근본법리 중에서 인식해 낸 부동(不同)한, 바른 깨달음의 이치(正悟之理)가 있다. 그래서 부동한 천체 체계는 모두 그의 자체 체계의 독특한 특징이 있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천지의 구조·환경의 형태·생명의 형식·생명의 장식(裝飾)·건축의 풍격(風格)·동식물의 표현형식 등등에서 표현되었으며, 그것들에게는 모두 자신의 독특하고 바른, 미를 표현하는 방식·우의(友誼)와 은혜를 표현하는 방식이 있다. 그렇게 많은 우주체계 중의 조화(造化)가 사람 여기에 전해지게 되면 기본적으로 두 개 체계 저층생명(低層生命)의 표현방식이 있는데, 동·서방예술이 포함된다. 그러나 거대한 궁체(穹體) 중에는 결코 이러한 것뿐만이 아니며, 내가 말하는 것은, 사람 여기에 전해진 것은 오로지 이 두 가지뿐이라는 것이다.

인류의 이 두 가지 예술체계를 놓고 말하면, 동·서방 각자의 민족문화 중에는 모두 몇천 년의 계승 과정이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예술의 풍격(風格)은 오히려 서로 크게 다른바, 기법상(技法上)·표현 방식상·감수상·시각상 모두 같지 않다. 중국예술의 계승과정 중에는 시작에서부터 바로 반신(半神)의 문화를 다졌다. 다시 말해서 절반의 중점은 사람의 표면에 놓은 것이 아니라 신운(神韻)과 내포에 두었다. 그러므로 모든 문화를 포함하여, 그 표현상 모두 이런 특징이 있다. 특히 미술방면에서 표면의 세부 표현을 그다지 중히 여기지 않고, 뜻(意)의 표현을 중히 여겨, 그것의 내포를 표현하였다. 그러나 서방의 예술 또한 신이 사람에게 전해준 것이지만 그것의 중점은 사람의 표면문화에 두어, 기법상의 출중(高超)·정확(準確)·세밀·진짜 같은(逼眞) 신공(神工)이 두드러졌다. 사람의 표층공간의 기능을 표현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으므로 미술작품 중 물체표면을 표현함에 매우 세밀하고 정확하였다. 그러므로 서방과 중국의 예술풍격의 두 갈래 길은 같지 않다. 발전 과정 중에서, 서방예술은 전 한 시기 문명에서 계승해 내려온 것이다. 사실 서방예술은 앞의 몇 차례 문명 중에서 줄곧 학술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연속되었고, 학교가 있고 이론이 있으며, 정규적 훈련이 있었으므로, 그것은 계속 이런 길을 걸었다. 그러나 동방예술은 연속 중에 줄곧 민간에서 유전되었으며, 문인(文人)과 장인(匠人) 및 도(道)를 구하는 자들 가운데서 유전되어, 계통적인 이론이 없고 학교가 없었으며, 정규적인 훈련 없이 완전히 개인경험에 의거하여 작품을 표현했는데, 특히 조소(雕塑)작품이 그렇다. 중국인의 문화특징으로 인하여, 표현한 회화(繪畫)와 조소(雕塑)는 기본적으로 역시 중국인의 문화성격이 작용을 발휘하였으며, 자신도 모르게 바로 뜻(意)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표현수법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사람의 가장 표면에 입각해서 보면, 서양예술은 수법상 매우 세밀하고, 명암·구조·투시관계에 대하여 반드시 정확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인체의 구조를 표현함에서 매우 정확했다. 그러나 중국 고대의 미술에서는, 계통적인 이론과 전문적인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가장 표면의 물체구조를 표현하는 데 정확성이 부족하였다.

예술의 길은 언제나 그것의 초기에서 고봉(高峰)에 이르렀다가 다시 떨어져 내려오며, 인류의 모든 문화 역시 이런 방향이었다. 과거 우주의 특성인 성(成)·주(住)·괴(壞)·멸(滅), 인류의 일체가 모두 그 속에 있다. 그러므로 인류의 도덕이 나빠졌을 때면 무엇이든 모두 나빠져서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데, 인류에게는, 바로 재난으로서, 일체가 모두 결속되고 일체가 또 새롭게 시작되며, 다시 정상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떨어져 내려오는 것이 반복된다.

중국 고대의 미술 그것은 계통적인 연구와 전문적인 학습이 없었기 때문에, 인체와 물체에 대한 투시관계를 기본적으로 정확히 장악하지 못했다. 청나라 말기 이후 중국 미술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서방미술의 기본기 기초가 있게 되어 작품은 표면외형상에서 정확해졌으며, 일부 이런 작품이 나왔다. 그러나 근대에 이른 후, 특히 최근 20여 년에 중국도 현대의식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작품도 갈수록 형편없게 되었다. 관념은 사람의 의식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만약 사람의 정념(正念)이 주도적 작용을 일으키지 않고, 사람의 표면의식의 감수에 완전히 의거하여 진념(眞念)의 인식이 아닌, 진정한 자신의 청성(淸醒)한 사고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영혼이 없어진 것과 같다. 사람의 의식은 후천적으로 사람의 표피에서 형성된 것이며, 표현상 단지 사물에 대한 하의식(下意識)의 반응일 뿐이다. 의식은 불안정하여 수시로 변하고, 외부조건의 변화와 사회형식의 변화에 따라서 변하게 되는 것으로, 완전히 이러한 것들에 의거하는 것은 주념(主念)이 없는 것이며, 더욱이 체계가 없고, 규범이 없으며, 정념이 없고, 진정한 자기(自己)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의식 상태에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소위 현대예술·현대미술작품이라고 하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바로 서방의 인상파와 추상파의 작품들이었다. 당신들이 냉정하게 그런 것들을 보면, 틀림없이 사람의 진념이 없이 사람의 표면관념에 따라 만들어낸 것과 같고, 체계적이지 못하고 규범적이지 못하며 규칙적이지 못하고 연속적이지 못한바, 표현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람에게 주는 미적인 감수가 없으며, 사람의 표면의식에 따라 나온 것이다. 그 당시 그들이 만들어 낸 그런 작품들을 보면, 그 무슨 코가 비뚤어진 것, 얼굴이 반쪽인 것, 한쪽 발이 뒤에 달린 것이 있는데, 시작부터 그런 것들은 바로 주념(主念)과 정념을 포기하고 만들어낸 것으로서, 후천적인 사람의 관념이 사람의 사지(肢體)를 사주하여 만들어낸 산물이다. 사람이 主意識(주이스)를 포기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표면 사람의 관념이 작용을 발휘하여 이런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의 출현은 거의 전 인류의 최정상이자 가장 완미(完美)한 서방의 예술을 훼멸시켜 버렸으며, 근대에는 중국에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아직 현대예술의 초기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관념은, 사회 전체 도덕이 갈수록 패괴(敗壞)되면, 관념 그것은 거기에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역시 아래로 미끄러져내려 간다. 애초의 그러한 인상파·추상파의 것들은 정확한 투시관계·명암의 과도(過渡)와 구조의 정확성을 전혀 상관하지 않았고, 갈수록 소위 개인의 감수를 추구하였으며, 착오적으로 이런 무이성적(無理性的)인 방종을 자아인성(自我人性)의 해방으로 여겼다. 이것은 진정으로 본성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며, 자아진아(自我眞我)가 없는 후천적 의식의 방종이다. 색채를 강렬하게 칠하며, 완전히 청성(淸醒)한 이념이 없는 관념을 방종케 한 그런 감수이다. 그러나 관념은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그것은 사람의 진정한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불규칙적이고 규범적이지 못하며, 체계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칠해낸 것도 역시 이러하며, 보면 전혀 조화롭지 못하다. 후기에 이르러 사람의 도덕관념이 갈수록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감에 따라 그것은 더욱 저하된 의식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이런 저하된 의식은 곧 사람의 관념뿐만이 아니었다. 사람의 주념(主念)·진아(眞我)가 사람표면을 지배하는 것을 포기할 때면, 그런 외래의 생물이 곧 틈을 타서 들어온다. 여기에까지 이르면 이미 외래의식이 인체의 대뇌를 조종하는 것으로, 색채가 더욱 침울하고, 더욱 음침(陰暗)해지며, 빛 역시 음산하고 흐릿하며, 완전히 인성(人性)이 퇴폐(頹廢)한 심태(心態)의 표현이 나타난다. 더 미끄러져 내려가면 사회의 명(名)·이(利)의 부추김을 더하여 완전한 자아 포기를 추구하는데, 이때는 후천적 관념도 가지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완전히 자아가 없는 껍질(軀殼)이 외래의식에 의해 100퍼센트 통제되는데, 이런 외래의식은 또 다수가 저승의 생물이며, 귀혼(鬼魂)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이것 역시 인류의 도덕이 나빠질 때의 천상변화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음성생물(陰性生物)에 의해 통제될 때, 그려낸 것을 보면 표현한 것이 바로 저승과 저승의 물체다. 많은 그림들이 귀신의 세계를 표현하였으며, 흐릿하고 캄캄하며 우중충한데, 그려낸 소위 인물들은 모두 혼과 같다. 저승의 땅, 저승의 하늘, 이러한 감각을 사람은 무엇 때문에 좋다고 느끼는가? 이것은 사람의 정념이 없어진 것이 아닌가? 이것은 음암(陰暗)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인류도덕의 큰 패괴(敗壞)가 아닌가? 이는 아직 단지 사람이 사람보다 더 낮은 그 한 층의 공간으로 걸어 나간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도덕이 계속해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예술은 한창 인류의 마성(魔性)을 그대로 펼쳐내고 있고, 예술은 이미 신성한 예술에 대한 모독으로 걸어 나갔으며, 완전히 마성발설(魔性發洩)의 공구로 되어, 표현한 것은 요(妖)·마(魔)·귀(鬼)·괴(怪)이다. 예술가 자신도 ‘이는 모두 쓰레기이지만 소위 예술의 조류 중에서는 오히려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이다.’라고 인정한다. 쓰레기가 어떻게 가장 좋은 것이 되겠는가? 사람의 관념이 반대로 되었기 때문에 쓰레기가 가장 좋다고 인식한다.

이것이 사람의 미술사(美術史)로, 나는 방금 대체적인 과정을 말했다. 나는 다시 서양예술을 말해 보겠다. 여러분 알고 있는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무엇 때문에 프랑스 사람들에게 투항하게 했는가? 프랑스 사람들은 싸울 능력이 없는가? 이 민족도 한때 나폴레옹·루이 14세 같은 영웅이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 민족 역시 휘황한 역사가 있지 않았는가? 사실 인류의 전쟁은 신이 통제하는 것이며, 목적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으로서, 사람이 뭘 나타내려고 해도 안 된다. 프랑스는 직접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속으로 투입되지 않았는데, 신의 목적은 이번 인류문명 중에서 겨우 남은 프랑스의 그런 예술품을 보존하려는 것인바, 그것 또한 인류가 이번 문명 중에서 가장 휘황하고 인류가 가장 긍지를 느낄 가치가 있으며, 진정한 인류의 가장 정통적이고 가장 완미한 예술이다. 만약 전쟁을 치른다면, 루브르궁과 베르사유궁전 등에 보존한 예술품은 모두 없어지게 되며, 파리 거리의 그런 예술도 없어지고 만다. 신이 사람에게 이런 것들을 남겨주려고 했으며,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장래에 그래도 사람 자신의 예술을 되찾아오는 데 참조가 있도록 하려는 것인바, 대법제자들도 이런 정통예술의 기본(功底)에 의해서 되돌아 걸어올 수 있는 것이다.

서양예술은 과거 몇 차례의 문명 중에서, 사람은 모두 학술의 방식으로 새롭게 성숙되어 전 한 시기(一期) 문명의 길을 걸어 지나왔다. 그러나 전 한 시기 문명이 훼멸된 후에는 기본기(基本功)가 미숙한 시기가 나타났다. 여러분들은 서방의 미술작품 중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르네상스 이전의 작품과 르네상스시기의 작품, 르네상스시기 이후의 작품과 근대의 것, 이런 과정이다. 르네상스 이전은 총체적으로 보면, 작품의 예술수준은 매우 성숙되지 못했다. 구도·구조·비례·색채 등 여러분들 모두 보았듯이 매우 성숙되지 못했다고 느낀다. 회화와 조소를 막론하고 모두 성숙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서양에서 출토된 문물 가운데서 일부 전 시기 문명의 것들을 발굴해 냈는바, 일부 신상(神像)이 있고, 또한 전 한 시기 고대 그리스문명 중의 기타 조소 작품도 있었는데, 모두 매우 성숙되고 완미(完美)한 작품이었다. 이러한 고대 문명의 기초가 있었기 때문에 서양예술은 매우 빨리 성숙으로 나아갔다. 왜냐하면 이전의 것이 있어서 배우고,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성숙됨이 매우 빨랐다. 르네상스시기 이후가 되어 다빈치와 그러한 예술가들의 출현도, 사실은 신(神)이 의도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사람을 이끌고 예술의 성숙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며, 사람에게 어떻게 작품을 완성하는가를 알려주게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때 그들의 작품은 인류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컸다. 그러나 근대의 현대 예술 역시 일부 다른 유형의 신이 배치한 것인데, 바로 오늘날 정법을 좌우한 구세력(舊勢力) 무리이다. 무엇 때문에 반 고흐라는 사람이 나왔는가? 무엇 때문에 피카소라는 사람이 나왔는가? 이런 사람들 역시 그것들이 배치하여 온 것이다. 그러나 바르지 못한 면(負面)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며, 목적은 바로 인류도덕이 미끄러져 내려갈 때 인류문화 중의 일체 역시 모두 동시에 패괴(敗壞)되어 나가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바로 인류의 예술을 난잡하게 만들려고 온 것이며, 바로 인류예술을 패괴시키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서, 완전히 인류의 문화를 훼멸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그들이 당초에 소위 현대파(現代派)라는 기초를 다졌기에, 인류의 예술이 오늘날 이러한 마성(魔性)의 상태로 걸어오게 되었다.

당초에 서방 정통 예술이 소위 인상파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바로 사진기술이 나타났다. 논쟁(論戰) 속에서 소위 그러한 인상파들의 가장 전형적인 말은 “당신이 아무리 정확하게 그려도 사진 찍는 것처럼 정확하겠는가?”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물체를 비슷하게·진실하게·정통적·표준적으로 그린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사실 정통적 예술은 사람으로서는 높은 질의 완벽한 추구이며 끝이 없는 것이다. 정통 예술 공간은 매우 광의적(廣義的)이다. 왜냐하면 완벽하고 좋은 한 폭의 작품은 비단 마치 진짜와 같을 뿐만 아니라, 사실 또한 작자 본인의 인생체험과 성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자가 인생 중에서 만났던 것, 인생 중에서 장악한 여러 면의 각종 학과지식과 기능은 모두 그의 작품 중에서 표현되어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똑같은 것도 작품 중에서 매 개인이 표현해 낸 것은 색채에서 표정과 태도, 기법에 이르기까지 장악한 정도를 막론하고 모두 같지 않다. 매 개인의 인생경험이 같지 않고, 작자의 성격특징도 같지 않기 때문에 작품은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표현하려는 것은, 대천세계와 더욱 높은 경지의 생명에서부터 신 및 신의 세계에 대한 아름다움에 이르기까지를 펼쳐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끝이 없는 광명대도(光明大道)이다. 일반적으로 그림을 그릴 줄 알고 소조를 할 줄 아는 예술가들은 사상의 대부분을 모두 자신의 예술에 쏟아 붓기 때문에, 대개 언사(言辭)에 능하지 않다. 그러나 그릴 줄 모르거나 소조 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말솜씨가 좋지만 하는 말은 모두가 억지로서, 사진 찍는 기술의 진(眞)을 논하는 이론으로 정통예술을 뒤엎었으며, 점차적으로 오늘날의 이러한 정도로 나아가게 되었다. 물론 당초에 정통예술을 뒤엎으려고 하면, 미술을 완전히 알지 못하거나 미술을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 초기에 배치한 그 몇몇 현대파의 대표 인물들도 그들로 하여금 아동 시절에 먼저 기본기를 장악하게 하였는바, 이래야만 세인들을 더욱 미혹시키게 할 수 있었다.

당초 학원파(學院派)와 인상파·추상파 사이의 정(正)과 사(邪)의 논쟁(論戰) 중에서, 인류도덕과 관념의 하락이 인류의 진정하고도 신성한 예술을 부정했기 때문에, 정통예술가들은 생존을 위해 겨우 조그마한 작디작은 공간을 짜내었는데, 현재 사람들이 정통예술이라 부르는 “사실파(寫實派)”다. 과거에는 이런 설이 없었다. 신이 사람에게 전해준 예술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류가 숭상하는 선(善)과 미(美)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이는 인류의 도덕에 대하여 바른 면(正面)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인류도덕의 패괴 때문에 정통 인류예술은 오히려 마성으로 발전하는 추세에 의해 정식 대학전당에서 밀려났다. 정통예술은 생존을 위해 사실파(寫實派)로 변하였는데, 사실(寫實)이란 설(說)은 바로 이렇게 온 것이다.

현재의 인류는 무엇이든 모두 이렇게 반대방향의 방면으로 걷고 있다. 당신들은 발견하였는가? 그러한 발성(發聲)할 줄 모르고, 악리(樂理)를 모르며, 무도(舞蹈)의 기본기(基本功)가 없는 자들이 가수·무용 스타로 되었고, 진정한 예술가들은 오히려 밥그릇을 잃게 되었다. 심지어 머리를 깎을 줄 아는 사람조차도 거리로 밀려나가서 노점을 하게 되었으며, 머리를 깎을 줄 모르는 자들은 오히려 아주 화려한 미용실 안에 있다. 인류의 일체 것들은 모두 반대의 방향을 향해 미끄러지고 있으며, 모두가 이렇게 패괴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소위 그러한 현대파들이 과거에 추구한 것은 바로 그 무슨 개인의 감수였으나, 후에는 자아의 통제 상실로 나아갔고, 현재는 자신의 신체를 귀신에게 맡겨 조종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무슨 좋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한 폭의 소위 현대파의 것을 거기에 걸어놓고,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아, 이 그림이 얼마나 좋은가 보시오.”라고 한다. 그가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가 좋다고 말한 것이 어디가 좋은지를 모른다. 그러나 그가 말한 좋다는 것은 오히려 마성의 것이며, 아울러 예술에 대한 유치함과 가소로움이 포함되어 있다. 당신의 사상이 그를 따라 그의 그 마성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당신은 그가 말한 소위 좋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아낼 수 없다. 사실 그러한 물건들은 모두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쓰레기들이다.

당연하다. 많은 사람들이 조류(潮流)에 따라 떠들썩한 것으로, 대다수의 민중들은 현대파라고 하는 그 일련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이 모두를 쓰레기라고 당신이 말하면, 이런 것을 하는 그런 사람은 쓰레기 같으면 같을수록 더욱 좋다고 말한다. 여러분들은 모두 들었다. 중국에 그 무슨 소위 예술가라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죽은 아이의 고기를 먹는다. 지난 한동안 보도를 들은 적이 있지 않은가? 바로 마성을 추구해서 여기에 이른 것이다. 이 일체가 더 발전해 내려간다면 무섭지 않은가? 인류의 예술이 이렇게 내려간다면 장차 무엇으로 나아갈지 사실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또 인류의 예술은 마땅히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지를 말하겠다. 인류의 예술은 사람 자체를 표현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산수(山水)의 환경을 표현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신(神)을 표현하기 위함인가? 귀신을? 알아야 할 것은 인류의 진정한 예술은 우선적으로 신의 전당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신이 사람에게 이런 종류의 문화를 전해준 다른 한 가지 목적 역시 사람들로 하여금 신의 위대함을 보게 하려는 것이며, 선악에는 보응이 있어 악을 행한 자는 악한 보응이 있고 좋은 사람은 복으로 보답을 받으며, 수련자는 천당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서방예술의 출현, 시작은 모두 교회에서부터였다. 동양의 조기(早期) 조상(造像)은 거의 모두가 신의 소상(塑像)이었으며, 중국에서 유전하여 내려온 가장 오랜, 가장 초기 회화(繪畫)에서 그린 것 역시 모두 신이다. 사람이 신을 그리는데 또한 끝이 있는가? 끝이 없다. 광활한 우주, 방대한 천우(天宇)의 일체를, 사람이 정말로 신을 믿을 때, 정말로 신을 표현할 때 신은 사람에게 펼쳐 보여 준다. 그것은 가장 완벽하고 가장 신성하며 또한 인류의 동경과 가장 아름다운 귀착(歸宿)으로서, 작품의 표현도 끝이 없다.

여러분 알다시피 사람이 신을 그리려면 그것은 사람을 모방해야 한다. 이것은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신이 자신의 모양에 따라서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을 기본기(基本功)의 연습으로 삼는 것은 문제가 없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는 것도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필경 세간(世間)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산수를 그리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류 미술작품의 창작중심은 마땅히 신이어야 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여러분 생각해 보라. 사람은 업력이 있다. 당신들은 대법제자로서 모두 알고 있는바, 사람들이 그린 일체는 모두 작자 본인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예술가의 작품 중, 그 개인의 일체 정황과 모델의 일체 정황이 모두 그 그림에 실리게 된다. 보통 한 속인이 한 필을 그리면, 나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에게 어떤 병이 있고, 얼마나 큰 업력이 있으며, 사상정황·가정정황 등을 바로 알 수 있다. 아울러 모델이 된 사람도 역시 그림 속에서 그 본인의 일체 사상과 그 신체가 지닌 일체 요소, 업력의 대소(大小)를 포함하여 충분하게 체현되어 나온다. 누가 그려진 이 인물화를 집에 걸면, 그러면 그림 속의 인물의 업력도 그림 속에서 발산(散發)되어 나온다. 이러한 물건을 집에 걸어놓으면 그 사람에게 이득이 있겠는가? 아니면 피해를 보겠는가? 업력이 발산되어 그것과 그 사람은 연대를 갖게 되는데, 끊임없이 그림을 건 사람의 집 속으로 발산된다. 사람들은 물체의 연대관계를 보지 못하는데, 사실 사람들은 모두 불편한 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신을 그리려고 하면, 여러분 생각해 보라. 신은 광명하고 위대하며, 자선(慈善)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어 사람에게는 유익하다. 아울러 그림 제작자와 조각자 모두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 이익을 얻음과 동시에 작자는 신을 창작하는 예술작품 중에서도 역시 선념(善念)을 생성하는데, 이로부터 신은 그를 도와 정념을 강화시킬 수 있고, 그 작자 신체상의 업력과 사상업력을 제거해 버릴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을 사람이 보면 이득이 있고 흉금이 넓어지며, 사상에 선념(善念)이 깃들어 인격이 더욱 고상해진다. 신은 사람에게 정념이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을 도와 위난(危難)을 해소해 준다. 이는 인류에 대해서 말하자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는가? 그러한 정통적인 작품, 신을 그린 그러한 천장·벽화, 또 신을 조소(雕塑)한 그러한 소상(塑像)을 나는 보기 좋아한다. 나는 보고 나서 늘 인류에겐 아직도 되돌아올 희망이 있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작품은 신의 위대함을 표현하고 있으며, 아울러 신상(神像) 그쪽의 신 역시 정말로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대비에서 볼 때, 여러분들은 인류의 예술이 마땅히 신을 표현하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가?

물론, 현대사회의 예술은 그림과 조소 작품뿐만이 아니라, 또 공예미술·광고·복장·무대예술·TV·영화·제품조형 등이 있으며, 여러 방면에서 예술과 관련이 있는 업종이 있는데, 다시 말하면 모두 미술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어느 업종이든 작자 본인이 바른 기초를 다졌다면, 당신이 무슨 작품을 창작하든 모두 바른 요소가 내비치고, 모두 아름다우며, 모두 선한 것으로, 사람에게 이익을 보게 한다. 꼭 이렇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내가 본 인류예술은 바로 이렇다.

방금 나는 동서양예술 중에 조소(雕塑)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말했다. 조소를 말하면서, 동양의 소상(塑像), 그의 출처와 역사과정에 대해서도 말해보려 하는데, 단지 이번 문명 중의 정황만을 말하겠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 들어오기 전에 수많은 조소 작품의 풍격은 모두 전 한 시기(다시 말해서 대홍수 이전)의 문화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불교가 중국(中土)에 전해 들어온 후와는 완전히 같지 않은 예술풍격을 갖고 있다. 엄격하게 말해서, 이번 인류문명을 대표하는 동양의 조소 작품은 마땅히 불교의 부처·보살과 신을 표현하는 것을 대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기(早期)작품의 조상(造像)수법은 인도에서 전해온 것이며, 아울러 인도의 조상수법은 또 이번 한 시기 인도의 불교 이전의, 부처를 믿던 시기로부터 남겨져 내려온 것이다. 아울러 전번 한 시기의 인도인들이 믿던 부처는 또 유럽의 고대 그리스인들 중, 부처를 믿는 사람들이 인도로 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더욱 조기의 유럽인들 중에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부처를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가 부처를 믿은 것은 아니었으며 다른 신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 인도에 전해 들어온 후 부처의 형상과 조상(造像) 수법도 인도로 전해 들어왔다. 그러므로 중국의 불상을 만드는 수법의 초기는 기본적으로 고대 그리스 식이었다. 여러분이 보는 아주 많은 조기(早期) 부처의 소상은 안와(眼窩)가 깊고, 미릉골, 안면부의 윤곽이 서양인의 윤곽과 같다. 코가 곧을 뿐만 아니라 매우 네모났다. 이는 바로 고대 그리스가 비교적 초기의 부처문화를 인도로 전해 주었으며, 또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상자(造像者)의 작품에는 모두 그 본인의 요소가 있기에 중국으로 전해 들어온 후의 조상(造像) 중, 부처의 형상은 또 중국인을 좀 닮았다. 중국으로 전해 들어온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고대 그리스 문화가 중국으로 전해 들어온 초기 때의 요소를 점차 잃어버렸고 점차적으로 더욱더 중국 향토의 느낌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사람의 표면 문화에서 말하는 것이며, 그 외의 원인이 또 있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 들어온 후, 확실히 수많은 사람의 副元神(푸왠선)이 부처·보살로 수련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그때는 체계적인 학술체계가 없었고 조상(雕像) 또한 모두 석공(石匠)과 수도자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서양의 조소(雕塑)와 비교하면 전문성이 없었는데, 기본적으로 신체구조의 비례를 정확히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 중국의 수많은 조상(造像)은 어떤 한 파(派)의 작품의 특징 때문이 아니라 기술이 성숙하지 못하여 그리된 것이다.

방금 나는 대체적으로 매우 간단하게 인류예술의 발전과정과 그것의 내원(來源)의 윤곽을 설명하였다. 과거의 예술은 통상적으로 신에 대한 표현이며, 신이 사람에게 이러한 것들을 전해준 것 역시 인류에게 ‘신이 인류를 비호(庇護)하고 있으며, 사람이 잘하면 곧 선과(善果)가 있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예술가의 작품에는 모두 어떤 것을 표현하려는 주체와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구도(構圖) 중에서 어떤 화면을 구상(構思)하며, 당신이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모두 그 자신이 표현하려는 의의가 그 속에 있는데, 다시 말해서 그것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서방의 정통예술을 볼 때에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특히 르네상스시기의 미술작품으로, 오로지 그것의 화법(畫法), 수법만 보았다. 이것 역시 기본기(基本功)를 아는 그러한 사람들이 이런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림 중에서 표현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은 매우 적다. 그러므로 내가 회화와 조소작품을 볼 때 주위의 수련생은, 이것은 무엇을 그렸습니까? 하고 나에게 묻는데, 나는 그들에게 그린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었다. 물론 여러분들은 모두 예술을 하는 사람들로서 또한 매우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공동으로 탐구해 보는 것도 무방하다. 그림 몇 폭을 골라서 나도 그림 중에서 표현한 것이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는지 말해 보겠다. (박수)

여러분 앉으시오. 방금 내가 이러한 그림들이 표현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 여러분들도 모두 내가 말한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대법제자들이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렇다면 당신들도 자기의 생각들을 말해 보도록 하라. 어떤가?

제자: (번역문) 우리는 박해를 표현하려고 하는데 대법제자가 형벌을 받는 형상을 표현할 수 있습니까?

사부: 표현할 수 있다. 대법제자가 박해당하는 정경을 표현할 수 있으며, 대법제자가 법 공부하고, 연공하는 것, 대법이 널리 알려진 후의 신(神)과 천상의 풍경, 이런 것들을 모두 표현할 수 있다.

제자: 우리가 대법제자의 진상을 명백히 밝히고 홍법하는 과정, 그리고 행진과 같은 등등을 창작해도 괜찮습니까?

사부: 이것을 모두 표현할 수 있지만, 관건은 당신들이 구상과 창작에서 일정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 사부님, 중국의 사의(寫意)인데요, 중국의 일부 저명한 화가 대다수가 사의를 그리는 이들과 산수(山水)를 그리는 이들입니다. 우리도 그릴 수 있습니까?

사부: 사의(寫意)는 문제가 없다. 중국화, 산수화 역시 괜찮다. 그것은 대법제자가 그린 것이기 때문에 전시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들은 대법제자이므로 지금 여러분 모두 다 법을 실증하고 있으며, 중생에게 미래를 창조해 주고 있으므로, 가능한 한 진상을 알리고, 사악을 폭로하는 것을 첫 자리에 놓아야 한다. 특히 이 시기에 이것은 대법제자의 책임이다. 사악을 폭로하고 대법을 펼쳐 보여주고 신을 펼쳐 보여준 이러한 작품이 좀 더 많으면 좋으며 이것을 위주로 해야 한다. 대법제자의 다른 작품도 전시할 수 있다. 

제자: 사의(寫意)는 변이(變異)에 속합니까?

사부: 내가 말한 사의(寫意)는 작품 속에서 내포를 표현함을 말한다. 사람이 정통정념(正統正念)의 도덕기초에 서서 정감을 표현하면 문제가 없다. 관건은 정념으로 창작하는가 아니면 소위 그 현대의식을 추구하는가, 정통표현수법을 사용하는가, 아니면 현대파의 관념으로 표현하는가 하는 것인바, 문제는 의(意)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제자: 사부님, 한 가지 여쭙고자 하는데, 방금 전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이 작품들은 모두 서방 신의 형상에 관련된 표현들입니다. 대법제자로서 중국과 서방(西方)이 용합(溶合)된 이와 같은 그림을 우리가 어떻게 그들의 그림을 참조하면서 또한 우리 자신 동방의 특징이 있게 할 수 있습니까?

사부: 동방과 서방인 형상의 신을 한 작품 속에 그리는 것은 문제가 없다. 정법 중에서 아주 많은 부동한 신들이 모두 바른 면(正面)의 작용을 일으켰다. 수많은 중국화들이 매우 좋으며 모두 인정할 만하다. 수법 상에서, 기교 상에서 더 제고한다면 이것은 모두 문제가 없다. 중국화와 서방 유화를 한 그림에 체현하기는 아주 어려울 것 같다. 동·서방의 수법을 한곳에 용합(溶合)시키는 이 선례를 연 사람은 아직 없다. 그야말로 이도 저도 아니게 만들지 말라.

제자: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더 높은 층차에서 말할 때, 동·서방의 아주 많은 신들이 부처 이하의 층차인데, 우리가 한 폭의 비교적 거대한 작품을 표현해 내어 이 작품 속에 모두 있게 해도 괜찮은지요?

사부: 당신이 한 폭의 대작을 창조하려 하고 작품 속에 동방·서방인물 형상의 신이 동시에 있게 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일부 도(道)를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또 일부 서방인 형상의 신을 그려서 동일한 작품 속에 있는 것은 문제가 없다. 만약 동일한 작품 속에 한쪽은 유화수법이고 한쪽은 중국화수법이라면 내가 봤을 때 안 된다.

제자: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작품 중에서 주로 광명(光明)한 것을 표현하기 때문에, 물론 어떤 작품은 내포가 비교적 많기 때문에 속에는 또 부정적인 인물이 나타나고 이렇게 하면 어떤 장면을 비교해낼 수 있습니다. 저는 한번 확인하고 싶은데, 부정적인 인물에 대한 처리에서 당연히 어두운 구석에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이 괜찮겠습니까?

사부: 괜찮다. 사실 당신이 이 그림을 보면 악경(惡警)이 대법제자를 때리고 있다. 색조의 표현에서 악경과 대법제자는 구별이 있으면서 정체적으로 또한 아주 잘 어울리며(協調), 문제가 없다. 그것은 당신들 기법상의 문제인바, 어떻게 그것을 잘 배치하느냐이다.

제자: 사부님, 저는 중국의 서법(書法)이 예술인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그리고 초서(草體)는 올바른 것입니까?

사부: 지금은 서예라고 부르지만, 과거에는 글쓰기이다. 근대 이후에 와서 사람 또한 붓으로 글을 쓸 필요가 없어 그것을 예술로 여겼다. 사실 그것에도 확실히 예술의 내포가 있다. 어차피 그것을 예술로 여긴다면 미술전시에서 그것을 미술작품으로 생각하라.

초서를 언급하니, 엄격히 말해서 사람의 부(負)적인 일면을 방종(放縱)한 심리표현이다. 과거에 신이 사람을 도와 글자를 만들 때 무슨 초서가 없었다. 사실 나는 붓글씨를 연습한 적이 없고 그다지 잘 쓰지 못하지만, 늘 사람들이 나를 불러 무엇을 좀 써달라고 하면 나는 예서로 쓴다. 내가 예서를 편애하는 것이 아니라, 예서, 이런 글은 누가 그것을 날려서 쓰려고 해도 날릴 수가 없으며, 날린다면 예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관념 혹은 사상 업력을 방임하는 중에서 그것을 날려서 쓰기 아주 어렵다. 이 한 점에서 나는 예서를 쓰기 좋아한다.

제자: 서예의 글자를 말할 때, 사부님께서 예서글씨를 쓰기 때문에 일부 대법제자들이 글자체를 고를 때 일반적으로 예서체를 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한 가지 여쭙고자 하는데, 각종 글자체를 여러 사람들이 모두 사용할 수 있습니까?

사부: 모두 사용할 수 있으며, 어떤 글자체든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초서는 내가 느끼기에 사람의 부(負)적인 일면을 너무 방임하여 사람의 표면요소가 너무 많으며, 사람의 진정한 정념으로 선행(善行)할 때 써낼 수 없는바, 주로 사람의 관념이 방임될 때 써낼 수 있고, 심하면 그때의 심태는 어느 정도 발광한 것이며, 바른 일면이 부족하다.

제자: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바로 삼원색(三原色)에 관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삼원색은 다른 공간에서 대응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우리도 보색(補色)에 관하여 토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삼원색을 이해해야 합니까? 사람 이 곳에서 우리는 빛 때문에 색이 나타나고 빛이 없으면 색을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공간은 전부 빛인데, 그 색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사부: 사람은 회화의 안료 중에서 삼원색을 섞어서 다른 색으로 조합할 수 있으며, 인류의 스펙트럼 중의 삼원색 역시 부동한 색의 스펙트럼으로 굴절시켜 합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인류 물질공간의 물질성분으로 조성된 것으로서, 기타 공간과 다르고 물질도 다르다. 어떤 사람이 물체의 형태는 빛으로 조성되었다고 하고, 회화 중의 명암의 표현과 색깔의 출현을 포함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물체는 빛이 없는 상황에서도 모두 그 형태이며, 빛은 단지 사람에게 시각상의 명암 감수를 조성할 뿐이고, 색깔은 빛의 강도변화에 따라 착각이 나타나지만, 실질적으로 색깔과 물체형상을 바꿀 수 없다. 수련의 각도에서 말하면, 빛은 또 사람의 눈을 장애하여 사람에게 가상을 조성한다. 다른 허다한 공간에는 태양이 없고, 또한 많은 공간의 일체 물체들은 전부 자신의 부드러운 빛 속에 있다. 한 가지 물체가 태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한 개 공간에 태양이 없다면, 물체의 형태는 역시 안정적이다. 어떤 공간의 일체 물체들은 모두 미미하게 눈이 부시지 않는 빛을 내보내고 있으며, 동등 층차의 생명 자신들도 보아낼 수 있다. 이런 공간 역시 태양 같은 직사광원(直射光源)이 없지만 보이는 물체형상은 여전히 그러한 형상이다.

다른 공간을 사람의 눈으로 보면 빛을 내보내는 것이며, 색깔과 물체의 형상이 변하지 않는다. (물론 신과 신의 일체는 모두 변화한다. 물체의 존재방식도 사람이 알고 있는 소위 안정된 상태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칼라 네온사인과 같이 등(燈)의 형태와 색깔은 빛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만약 생명이 바로 그 한 층차의 생명이라면, 그는 사람이 그 공간을 본 것과 같은 느낌이 아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한 것처럼 분자도 에너지가 있지만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일체 또한, 눈을 포함하여, 분자입자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분자보다 낮은 더 큰 입자로 구성된 생명이라면, 마찬가지로 인체와 사람의 공간의 일체 물체가 빛이 있고 에너지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위에서 말한, 태양이 없이도 일체가 모두 빛을 내보내는 공간과는 같은 개념이 아닌바, 그것은 바로 물체 자신이 빛을 내보내는 공간이다.

사람의 이 공간, 그것은 바로 정법을 위해 특수하게 만들어진 이러한 곳이기 때문이다. 삼계(三界) 이 범위를 벗어나면 완전히 달라진다. 삼계와 동등하게 존재하는 다른 더 많고 더 광범한 공간, 일체 물체들의 구조(結構)가 모두 변하게 되며, 인간세상과는 모두 다르다. 물체의 형식을 보아도 세상 사람들이 보는 이런 명암(明暗)관계와도 똑같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 이곳에서 표현된 명암관계는 사람에게 특수하게 만들어준 환경표현이다. 천상의 신과 아주 많은 천체에는 태양이 직접 비추는 광선이 없다. 그러나 또 아주 많은 천체에는 한 개의 태양이 비추는 빛뿐만 아니라 어떤 곳은 태양이 있고 어떤 곳은 태양이 없다. 생명이 부동한 층차에서 느끼는 빛의 강도 또한 다른바, 그들 역시 모두 부동한 층차의 빛의 존재형식에 부합된다. 수련생이 쓴 문장에서 삼원색과 眞(쩐)·善(싼)·忍(런)은 관계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수련 중에서 자신의 감수이고, 眞(쩐)·善(싼)·忍(런)의 근본적인 실질이 아니다.

사람이 일단 천상의 정경을 보면 깜짝 놀람을 금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어떤 색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분자로 구성된 표면물질은 사람이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으며, 사용할 수 있지만, 분자보다 더 미시적인 입자로 구성된 것은 일반적인 사람은 다만 그것의 에너지를 감수할 수 있을 뿐이다. 분자보다 더 미시적인 입자로 구성된 이런 공간의 물질 색깔은 사람 이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 사실 분자도 에너지가 있으며, 아울러 에너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에너지를 생기게 하는 작용을 한다. 세인들이 에너지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세인의 신체구조·눈·피부와 혈액과 근육, 일체가 분자입자 한 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등한 층차에서 사람은 동등한 층차의 에너지를 느낄 수 없다. 미시적인 층차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사람, 이 한 층의 물체로 구성된 입자 과립이 미시적인 입자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말하여, 그 색깔을 구성하는 요소 역시 한 층의 입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고층공간이 한 층 낮은 입자로 구성된 공간보다 더 밝고(明亮) 빛나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경지를 초월한 그러한 밝음이기 때문에 인간세상에서는 이러한 색깔을 찾을 수 없으며, 비록 형광색을 사용해도 표현해 낼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색깔로 그 한 경지의 신성함을 표현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인류의 현재 있는 색으로 화면구조와 장엄한 신의 자태(神態)를 표현할 수는 있다. 그의 형상에서, 구조에서, 사람의 염료로 여전히 표현해 낼 수 있다. 당신이 완전히 신의 일체로 신을 인간세상에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신이 인간 세상에 온 것이다.

제자: 사부님께서 불(佛)·도(道)·신(神)의 그 옷 혹은 보편적인 그 장식(裝扮)을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사부: 우리가 보편적으로 본 부처의 차림새는 바로 황색의 가사(袈裟)이다. 보살은 중국 고대 부녀의 그런 차림새로 그리면 되는바, 당신들은 송대(宋代) 부녀의 장식그림을 참조할 수 있고 그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백인형상의 신은 어느 세계든지 그들은 보편적으로 모두 한 조각 크고 하얀 가사를 둘렀고, 부처는 한 조각 크고 노란 천 가사를 둘렀으며, 흑인형상의 신은 한 조각 크고 붉은 천 가사를 두르고 있다. 물론 더 다양하고 더 고층의 표현이 있는데, 어떠한 복식(服飾)을 하지 않은 이도 있다. 그리고 각종각양의 매우 원시적인 복식을 한 각종각양의 신이 있다. 작품 중에서 보편적으로 세인들이 인식할 수 있게 표현하면 족하다. 도(道)는 당연히 중국고대의 복식이고, 이것은 일반적인 도(道)이며, 사실 아주 고층의 그 대도(大道)가 입은 옷도 각종각양이다.

과거에 수련하는 사람에게는 또 한 가지 현상이 있었는데, 당신이 어느 때 어느 조대에 수련되었든지 원만할 때 입고 지닌 장식이 바로 그의 이후의 옷으로 되었는데, 보통 일반적으로 이랬다. 물론 부처는 다른바, 부처로 수련된 모든 이들은 반드시 부처의 형상이었고 부처의 그런 옷을 입었다. 다른 신(神)을 수련하는 것에 대해 말하면, 일반적인 상황에서 수련 성취하였을 때 어떤 것을 입었으면 이후에는 바로 그런 옷을 입었다. 당신들 중에서 누가 무당산(武當山)에 가 본 적이 있는가? 그 현무(玄武)의 초상화(畫像)를 보았는가? 현무의 초상화는 왜 머리를 풀어헤쳤는가? 그것은 그가 수련되었을 때 머리를 풀어헤쳤기 때문에 그는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그 형상이다. 그는 오랫동안 산 속에서 가부좌하였고, 머리를 묶는 것이 번거롭다고 느끼고 묶지 않았으므로 수련되었을 때까지 그러하였다.

제자: 사부님, 고대 그림 속의 부처에는 옷을 입은 부처가 있고 어깨를 드러낸 부처가 있습니다.

사부: 어떤 때는 사람이 자신의 관념으로 부처를 그린다. 예를 들어, 남아시아는 날씨가 아주 더워 스님들은 보편적으로 모두 어깨를 드러내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어 시원하다. 조금 북쪽에서는 스님들이 천으로 또 오른쪽 어깨를 가리는데, 오른쪽 어깨를 가리니 춥지 않았다. 부처의 세계에는 이러한 개념이 없고, 보편적으로 그들은 바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러한 옷차림이다. 중국인이 부처상을 그릴 때 중국인의 관념은 그 어깨를 전부 가리는 것이지만, 사실 신의 옷차림은 바로 이러하며 서방인 형상의 신 역시 한 쪽 어깨를 드러낸다. 이러한 옷차림은 소매가 없기 때문에 양쪽을 모두 가리면 행동이 불편하다.

제자: 여쭙겠습니다. 우리가 그림그리기를 배우는 데 그 기본기(基本功)는 왜 이렇게 배우기 어렵습니까? 찾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중국에서 그림을 배울 때 어떻게 하면 기법(技法)의 수준을 제고할 수 있습니까?

사부: 주로 서방국가의 교육이 소위 현대파 의식의 영향을 심하게 받으므로 학생의 기본기 훈련을 근본적으로 중시하지 않는다. 아울러 아주 많은 교사·교수 모두 그 현대파들이고 그들 자신도 모르며, 그림 그리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모른다. 기본기를 장악함에 대하여 말하면 그것은 간고한 훈련을 거쳐 비로소 장악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정물(靜物)을 그리는데, 구조와 투시관계를 장악해야 하며, 정물을 잘 그리려면 스케치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런 다음 정확한 색채운용이며, 일보 일보씩 그림 그리는 기본 솜씨를 장악한다. 기본기는 한 화가·조소가로서 반드시 장악해야 하는 것이다.

제자: 중국은 무엇 때문에 오랫동안 모두 풍경화를 그렸습니까? 물론 중국에도 부처의 형상을 표현한 것이 있었습니다. 다만 중국역사에서 대다수는 산수화를 그린 것입니다.

사부: 중국화는 의(意)를 중시함이라, 그것의 경지와 내포를 그리기 때문에 대다수는 모두 산수를 그렸다. 필경 중국인은 반신(半神)문화였기 때문에 의식 중에서 사람을 너무 많이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역시 내가 앞에서 말한 원인인데, 대다수는 산수를 그렸다. 그러나 또 사람을 그린 것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모델을 사용하지 않았고 완전히 구상해낸 것인바, 이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깨끗하였다. 물론, 진짜 사람을 전혀 그리지 않은 것은 아니고, 역사상 일부 영웅인물·사람들이 기념하는 인물을 화가도 그렸는데, 근대에 와서 비교적 풍부해졌다. 사실 발견된 가장 초기의 중국화는 여전히 신을 그린 것이고, 아울러 사원에는 고대에서 지금까지 줄곧 모두 불(佛)·도(道)·신(神)을 표현한 그림이 있었다.

제자: 중국화는 선(線)을 위주로 하는 것이며, 색채가 아주 맑고 깨끗(淸淡)한데, 서양화는 색채를 아주 중시합니다. 우리 중국화는 색채에서 서양화처럼 그렇게 해야 합니까?

사부: 아니다. 동양화는 바로 동양화의 특징이며, 마땅히 어떻게 그려야 하면 그렇게 그려야 하는데 당신이 고치기만 하면 그것은 아니다. 동양화는 바로 선(線)에 치중하고, 서양화는 선(線)을 그릴 수 없고 당신이 선을 그리면 틀리는 것으로, 그것은 명암으로 그림을 구성한다.

제자: 사부님, 우리는 사의(寫意)나 혹은 사실(寫實)을 그립니다. 그림을 그릴 때 당신의 법신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까? (뭇사람이 웃음)

사부: 나의 법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뭇사람이 웃음) 그가 사상으로 한번 생각하면 당신은 어떻게 그려야 할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당신은, 나는 지금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부님께 그리도록 해야지, (뭇사람이 웃음) 그건 안 된다.

제자: 그 때에 화가는 아마 초상(超常)적인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매우 초상적일 수 있습니다.

사부: 반드시 초상적인 것은 아니며, 어떻게 하든지 아주 이지적이고 아주 정상적이다. 마치 당신들이 대법을 수련하는 것과 같이 일체가 아주 정상적이다. 대법제자가 마땅히 그려야 할 것이면 당신은 마땅히 그것을 잘하면 되고, 어떤 상태로 들어간다는 설이 없으며, 또한 이런 생각이 없어야만 비로소 맞는 것이다.

제자: 사부님, 저는 부동한 사람형태(人形)를 그리려고 하는데 사부님께서는 흑인의 신은 붉은 가사를 둘렀다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그의 머리카락이 어떠한지를 모릅니다.

사부: 보편적으로 당신들이 서방의 신을 그리려면 르네상스시기의 미술작품을 참조할 수 있는바, 서방 르네상스시기 미술작품 중의 신의 형상이다. 성년남신(成年男神)은 일반적으로 수염이 있는 이가 비교적 많았는데, 물론 수염이 없는 이도 있다. 부처는 일반적으로 수염을 기르지 않지만, 또한 소수는 수염이 있다. 흑인형상의 신은 흑인의 머리카락과 같이 짧은 곱슬머리인데, 사람은 신이 자신의 모습에 따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 (번역문) 저는 저의 학교를 위해 그림 한 폭을 그리는데 주로 자화상입니다. 저는 그릴 때 마음을 써서(用心) 그리면서 되도록이면 관념이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반응이 괜찮고 구도(構圖) 역시 마술처럼 더욱 좋게 변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문제는, 오로지 우리가 마음을 써서 그리면 잘 그릴 수 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지도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사부: 엄격하게 말하면, 그림을 그릴 때 반드시 마음을 써야 한다. 당신이 마음을 쓰면 모두들 당신이 잘 그렸다고 말하지만 기본기를 중요시하는 시대에 비하면 여전히 차별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느끼기에, 기본기를 조금 더 잘 연습하면, 대법제자는 더 잘 그릴 수 있으며, 후세사람들에게 한 갈래 바른 길을 남길 수 있다. 물론 마음을 써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옳다.

제자: 제가 사부님 초상화(畫像)를 그릴 수 있습니까?

사부: 아이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상을 만들었고 상을 그렸지만, 결과는 모두 닮지 않았다. 그리는 것은 괜찮고, 문제가 없으며, 사진을 가지고 그려라.

제자: 사부님, 저는 아주 많은 수련생들이 정말로 사부님을 그리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또 다른 공간의 상(像)을 그려낸 것이 어떤 것은 닮았으며, 그래도 정말로 법신의 위력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려낸 상(像)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그것은 필경 사부님의 사진이고 그리고 그 밑그림(草圖)은요?

사부: 그 밑그림(草圖)은 태울 것이면, 태워버리는 것으로서, 문제가 없다. 정법시기라, 대법제자는 법을 실증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제자: 그럼 잘 그려진 것을 우리가 향을 피워 올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부: 그림으로서 보존하면 된다.

제자: 사부님, 저는 오늘 말씀을 듣고서 사로(思路)가 많이 틔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문자로 있게 할 수는 없는지요. 왜냐하면 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오지 못했는데, 역시 예술에서 아주 성과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부: 내가 이번에 말한 법리를 정리한 후에 다시 말해 보자.

제자: 저는 창작의 길에서 어떻게 가야 할지에 대하여 원래 저는 머리가 온통 공백이었는데, 지금은 알게 되어 아주 기쁩니다.

사부: 이것이 바로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법이었다.

제자: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저와 같은 경우, 완전히 서양화를 배웠지만 저는 중국화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릴 때 표현을 위주로 하고 전통적인 수법에 국한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부: 당신은, 내가 기법에서 양자의 장점을 취하겠다고 말하는데, 아마 이전에도 시험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신은 해볼 수 있지만 조화로워야 하고, 보기에 감각이 아주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러나 시험한 후, 당신은 아마 여전히 진정으로 동서방의 그림문화를 한곳에 할 수 없음을 느낄 것이다.

제자: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우리의 그림, 예를 들면 천사, 날개를 지닌 것처럼, 서방의 것과 동방의 것을 한 곳에 섞을 수 있습니까?

사부: 정법 중에서, 완전히 바른 면의 작용을 일으킨 신, 동·서방인 형상의 신과 각종각양 형상의 신이 모두 있다. 전적으로 당신의 화면 속에서 표현하려는 의의(意義)가 무엇인가에 달렸다. 다시 말해서 구도(構圖)에 따라 수요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방인 형상의 신에는 날개를 지닌 이가 있고 날개를 지니지 않은 이가 있으므로 당신의 구도의 표현을 보아야 한다.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주는데, 낮은 층의 공간의 신, 그들은 내가 와서 법을 전하는(傳法)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구세력은 그들을 배치하여, 내가 어떻게 법을 전하고 사회는 어떤 상태인가를 좌우지하게 하였다. 물론 나는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하지 않았다. 법을 전할 때 내가 어떤 형상으로 정법하는가, 이는 뭇 신들을 놓고 말할 때 아주 큰일이었다. 부처와 도는 나를 위해 형상을 선택하는 문제에서, 그 당시 낮은 층차 중에서도 고집하고 양보하지 않는 것이 발생하였고, 도교(道敎)는 또한 이로 인하여 생겼다. 도는 나로 하여금 도의 형상을 선택하게 하려했고 나에게 도(道)로 도법(道法)을 말하도록 하려했다. 그러나 그들 자신도 도는 단독전수(獨傳)임을 알고 있었는바, 그럼 단독전수(獨傳)가 어떻게 중생을 구도할 수 있으며, 어떻게 대법을 전할 수 있겠는가? 안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방법을 생각하여 또 지상에서 종교를 만들었으며, 이로 인하여 도교가 나타났다. 후에 도교 중에서 아주 많은 도들도 부처·보살로 나뉘어졌으며 천상에서도 정말로 도의 세계가 있게 되었다. 그들이 나에게 도의 형상을 선택하도록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부처 그쪽에서도 내가 부처를 선택하도록 여건을 만들었고, 마땅히 부처의 형상이어야 하며, 자비하고, 중생을 널리 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중국으로 전생하였는데, 내가 서방에서 전생하였다면, 그 백인형상의 신들도 여건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역사상 도(道)와 부처의 경쟁은 바로 이로 인하여 발생했다. 내가 나의 얻고자 하는 일체를 확정한 후 이런 형상의 경쟁은 결속되었다. 나 또한 구세력의 배치에 따라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천상의 신은, 어느 종류의 신이든지 간에, 천상에 일이 있을 때 그들은 함께 모여서 상의한다. 예수가 지상에 와서 사람을 제도할 때도 뭇 신들이 협동(協同)하였는데, 지상에서 발생하는 큰일은 천상에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가 법을 전하려고 한다면, 다른 신들이 승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방금 전에 말한, 부처와 도가 고집 피우게 된 이런 일은 모두 지나갔고, 법을 전하는 일이 정해졌기 때문에, 무슨 경쟁할 것이 없게 되었으며 모두 좋아졌다.

제자: 수채화는 중국화(中國畫)와 조금 비슷하고 유화와 조금 비슷한데, 어떤 작품은 수채화와 중국화로…….

사부: 수채화(水彩畫)를 배우는 기본기는 서방의 것인데, 그러므로 수채화는 여전히 서방의 화법(畫法)이다. 염료 그 자체를 말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수채화를 그리거나 아니면 중국화를 그리는 데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신이 수채화로 중국화를 그려도 문제가 없고, 당신이 수채화로 유화의 그 화법을 그려도 문제가 없다. 수채 자체는 동·서방 화법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어떤 염료를 쓰고 어떤 그림을 그리는 것과 화법 자체와는 다른 것이다. 동·서방화 또한 색채표현에서 짙고 옅은 문제뿐만 아니라 그것의 내포에 두 가지 문화가 받쳐주고 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두 동·서방화의 결합을 시험했지만 사실 모두 실패했다. 중국화와 서방화는 표현상에서 화법과 염료의 기법문제뿐만 아니라 그림의 배후에는 모두 방대한 민족문화가 있다. 매 한가지 문화 중의 각종 기능은 모두 그 민족의 정체(整體) 문화의 결정체다. 동·서방문화를 완전히 한 곳에 혼합시켜 뿌리 없이 변이된 것으로 변화시켜 버리지 않는 이상, 사실 동·서방 그림을 한 곳에 그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제자: 우리는 천지개벽을 그리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주중의 구세력이 훼멸되었는데, 그럼 좋은 것, 바로 그 천체(天體)가 좋게 변했다면 나쁜 것은 떨어뜨려지는데 그럼 이런 장면은, 가장 좋기는 신의 형상을 거기에 넣어야 됩니까? 아니면 다만 단순한 일부 색깔의 변화만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장 좋기는 사부님이 방금 전에 말씀하신 일부 내용도 넣어야 되는지요.

사부: 추상적으로 그려서는 안 되며, 표현하고자 하는 이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바로 바른 길로 되돌아 걸어와야 한다.

제자: 그 천상(天上)의 그런 신수(神獸)에 관하여 방금 전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사자 또 일부 용·봉황이 있는데요. 그럼 용 같은 것을 말한다면, 용 무리(龍眾) 또 사부님이 경문에서 언급하신 붉은 색의 악룡(惡龍)같은 것, “붉은 용의 목을 베다(赤龍斬)”와 같은 것이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 용도 구별이 있는 것입니까?

사부: 용의 외형은 같은 것이다. 용도 좋은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는데, 악룡(惡龍)이 있으며, 좋은 용(好龍)·신룡(神龍)이 있다. 보통 보는 천국세계·부처세계(佛世界)의 용은 모두 금룡(金龍)이며, 금빛을 뿌린다. 한 가지를 설명해야 하는바, 동방문화에서 말하는 용은 서방문화에서 말하는 용과는 같은 종류의 생물이 아니며, 같은 물종(物種)이 아니다. 동방문화 중에서 용의 색깔도 부동하며, 어떤 것은 흑백의 물고기의 색깔과 같으며, 또 어떤 것은 빨간 것이 있으며, 노란 것·흰 것이 있으며 또 검은 것도 있는데, 그것은 같지 않다. 왜냐하면 용도 층차의 구분이 있는바, 천룡(天龍)·지룡(地龍)과 물속의 용의 구별이 있다. 서방문화 중에서 말하는 그 용은 일종 지옥의 악한 짐승이다. 흔히 중국 사람들이 용을 말하면, 아주 많은 서방인들이 용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감각, 사실 그것은 동·서방문화의 차이이다. 서방사람이 말하는 그 용은 생김새가 약간 용머리(龍頭)같으며 가느다란 목·공룡과 같이 거칠고 큰 신체, 깃털이 없는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게다가 이런 생물은 서방인 형상의 신(神)의 체계 중의 저층(低層) 생물이다. 서방인 형상의 신의 체계 중의 그 지옥 속의 용, 그것은 음화(陰火)를 뿜어낼 줄 안다. 사실 내가 보니 과거의 사람이 번역하는 중에 대응을 잘못시킨 것으로, 그 짐승을 용으로 불렀는데 그것은 동방의 용과 같은 것이 아니다. (서양인 수련생에게 물으심: ) 당신들이 말해보라. 서방인의 이 용에 대한 개념은 내가 말한 것처럼 이렇지 않은가? (답: 그렇습니다.)

사실 같은 종류의 생물이 아니다. 서방의 천국세계 속에는 보통 동방에서 말하는 그런 종류의 용이 없는데, 그것은 그 체계의 생물이 아니다. 게다가 백인 형상 신의 체계는 지상의 백인 사회와 대응되는데 줄곧 더욱 낮은 공간에 이르기까지 대응되며, 이 체계 속에서는 용을 말하지 않으며, 이런 종류의 동물의 체현(體現)도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는 아주 많은 생물은 동방인 형상의 신의 체계 중에는 또 없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서방은 과거에 지상에 한 짐승이 있었는데, 말의 하반신·사람의 상반신이며, 이것은 동방세계 체계 속에서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만 문화적 차이뿐만이 아니라 그 세계 체계 속에는 없는 것이다.

제자: 사부님 저는 한 가지 문제를 여쭙고 싶은데요. 저는 유화(油畫)를 그립니다. 그럼 좋은 그림 한 폭을 그리려면 아주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요. 왜냐하면 제 생각에는 해야 할 항목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사부: 정진(精進)하는 대법제자들은 모두 매우 바쁘다. 정법시기(正法時期)에 진상(眞相)을 밝혀야 하고, 중생을 구도(救度)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내가 오늘날 여러분들에게 말한 것은, 우리 이런 특수한 전문적인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또한 이런 미술작품을 창작해야 한다. 이런 작품을 창작하려면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이것을 나는 아주 똑똑히 알고 있다. 그러나 괜찮은바, 당신들은 되도록 당신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을 이용하여 그리면 된다. 하지만 시간을 너무나 길게 끌지 말라. 되도록 가서 그리되 어느 정도 잘 그려졌으면 우리는 그때 가서 전시를 한 번 하자.

제자: 사부님,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두 개의 관계를 조화롭게 배치하는 것입니다. 한정된 시간에 이것을 하면 저것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부: 그렇다. 그럼 그것을 합리적으로 잘 안배하라. 내가 당신들에게 하라는 것도 모두 다른 사람과 미래의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남겨주라고 하는 것만이 아니며, 당신들 자신의 수련(修煉)에 대하여 도움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모두 이 사회 환경 속에서 생활하며 또한 이 시대로부터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 사람의 관념은 바로 이러한바, 모두 큰 염색 항아리 속에 있는데, 우리 이런 특수한 기능이 있는 이들은 틀림없이 이 방면에서 받은 영향이 다른 사람보다 클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창작하는 중에서 바른 길로 되돌아 걸어오는 과정이 자신을 씻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술상에서 자신을 되돌아 승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본질상·관념상에서 자신을 개변시키는데 자신을 수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자: 저는 어제 사부님께서 회의장에서 法輪(파룬)을 돌리는 것을 보았는데요. 매우 격동적(震撼)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 광경을, 저 혼자만 생각한 것인데요, 그것을 그리려고 합니다. 그 당시 사부님께서 양복을 입고 계셨는데 너무 직접적·세부적입니까?

사부: 그리는 것은 그릴 수 있으며, 양복 입은 것도 괜찮다.

제자: 사부님, 저는 두 문제를 여쭙고 싶습니다. 하나는 우리 法輪大法(파룬따파)는 많은 신들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신, 물론 수련생들이 수련성취하면 모두 부동(不同)한 불(佛)·도(道)·신(神)이 되며,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수련 잘한 많은 동수들을 표현하고 싶은데 아마 어떤 이들은 이미 대단히 수련을 잘했을 것인바, 우리는 모두 그들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부님이 언급하신 많은 기타 정교(正敎)가 신앙하는 신 그리고 불교도 많은 바른 신(正神)이 있는데, 그럼 이런 것을 우리가 표현해도 됩니까?

사부: 대부분은 다 괜찮다. 이렇게 말하자. 불교 중에서 언급한 신(神), 현재 사람이 능히 알 수 있는 불교 중에서 말하는 그런 불(佛)·보살은 다 된다. 노자(老子)·도(道), 여호와·예수·성모마리아도 모두 문제가 없다. 그러나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證實)하는 중에서 대법과 무관한 신을 표현한다면 어떠한 의의(意義)도 없다. 당신들이 무엇을 표현하고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이것은 내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제자: 또 하나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과거의 르네상스 시기의 일부 경전 작품이 남아 있는데, 예를 들어 『최후의 만찬』 등등입니다. 제가 느끼기에 이런 작품들은 공정이 아주 큽니다. 저는 우리도 아주 좋은 작품이 남겨지기를 희망하는데 그러나 그들과 같은 형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法輪大法(파룬따파)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신은 같은 것입니다. 첫째로, 구상(構思)이 아주 좋아야 하고, 기술이 있어야 하여, 시간이 있어야 하고, 또 아주 많은 여건이 구비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생각하기에 만약 이런 공정을 잘 하려면, 총체적으로 많은 공을 들여야 합니다.

사부: 아주 크게 생각하였다. 조급해 하지 말고 천천히 하라. 여러분이 현재 가지고 있는 능력에 의거해 창작하라. 당신들은 시작이며, 만약 당신들이 능력이 있으면 당신들은 하고, 당신들이 하지 못하면 이후의 사람이 반드시 할 것이다. 인류는 반드시 대법(大法)에게 휘황(輝煌)을 창조해 줄 것이다. 왜냐하면 대법은 사람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박수)

제자: 사부님, 제가 느끼기에 중국 그림 중에서 부처의 형상은 장식이 아주 많으며, 아주 예쁘게 그렸습니다. 그러나 현재에 그린 것은 모두 다 아주 간단한데 제가 보기에는 예쁘지 않습니다.

사부: 착안하는 점이 같지 않은바, 사람 여기에서의 표현은 바로 이러하다. 부처는 부동한 시기에 부동한 시기의 사람에게 부동한 시기의 옷차림을 나타내 준다. 내가 법을 전하는 초기에, 아주 많은 보살(菩薩)들이 나를 찾아왔을 때, 그녀들이 입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당신들은 상상하지 못한다. 당신들이 알다시피, 중국의 여자 아이들이 문화대혁명 때, 가장 입기 좋아한 것은 초록색의 군복이었는데, (뭇 사람들이 웃음) 그녀들은 초록색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변해서 왔다. 내가 말하는 뜻은 바로, 부처는 부동한 시기의 세인들의 관념에 따라 나타내 줄 것이다. 사실 부처의 본래형상(本象)은 바로 노란 가사·파란색의 곱슬머리이다. 물론 고대시기의 조각상과 회화는 현재와 일정한 차이가 있다. 그 당시 그린 불상은 온 눈에 가득 찰 정도로 장식이 많았는데, 그것 역시 그 당시 사람의 관념에 따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만약 능히 부처의 본래형상을 볼 수 있을 때에는 또 부처의 세계와 불체의 빛남(光輝)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지극히 수승(殊勝)한 나타남이다. 신은 일부러 변화하여 나타내 준 것이다.

제자: 우리가 현재 그린 것이 아주 간단합니다.

사부: 당나라 때 그린 불(佛)·보살(菩薩)의 옷차림과 장식물은 비교적 많았다. 당나라 그때의 화상(畫像)에 따라 그리고 싶으면 그려도 된다.

제자: 저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반년을 머물렀습니다. 저는 가이드의 소개를 들었는데, 모나리자 이 한 폭의 그림을 소개할 때, 그는 이전의 신을 말하면서 모나리자는 이전의 신의 일종 형상을 대표하였다고 말하면서, 신은 어떠한 장식물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신 것을 들었는데요. 저는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부: 이 그린 것은 사람이지 신이 아니며 또한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속의 그림자는 아주 선하지 않다.

제자: 가이드는 이전의 귀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면서, 귀족들은 이전에 어떠한 것을 장식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부: 다 사람이 말한 것으로 관광 안내 글은 믿을만하지 못하다. 천상(天上)의 아주 많은 신들은 귀걸이를 한다. 천상의 여신(女神)은 귀걸이 등 장식물을 하는데, 그것 또한 법기(法器)이다. 서방인 형상의 신, 여신 몸의 장식은 아주 적은 것 같다. 보살의 장식은 비교적 많은 것 같은데, 통상적으로 신은 모두 목걸이가 있으며, 보살은 또 큰 염주가 있는데 아주 길다.

제자: 사부님, 선녀가 꽃을 뿌리는 것은 무슨 뜻인지요? 저는 아직까지 모릅니다.

사부: 지상에서 사람을 제도하는 자가 도를 말할 때이거나 좋은 일을 했을 때 그녀들은 꽃을 뿌린다. 아주 많은 수련생들이 보았듯이, 사부가 매번 설법할 때 그녀들은 모두 꽃을 뿌리고 있다. (박수) 그녀는 중생들을 격려하는 것이며 당신들에게 꽃을 뿌려주고 있다.

제자: (번역문) 저는 다른 공간의 신을 자주 보지 못하는데요. 보더라도 그다지 똑똑히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비로소 자신이 그린 것이 정확한지를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신을 그릴 때 무엇을 그려야 합니까?

사부: 보통은, 대체적으로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형상인지를 아는데, 이것이 바로 기초이다. 당신들 주위에 아주 많은 대법제자들이 각종 광경을 본 적이 있는바, 당신들은 그들이 한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 자연적으로 화면의 구조와 표현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제자: 저에게 가르쳐 주세요. 아동 그림으로 말하자면 어린이들은 가장 순진하고 가장 천진하지만 그들은 기술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손을 통해서 그린 이런 표현방법은 우리가 원하는 아주 기술적인 것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부: 그렇다. 화가는 바로 화가이고, 아이들은 바로 아이들인바, 아이들은 화가가 아니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기 좋아하는 것은 화가를 향해 나아가는 시작이지만 역시 화가와는 같지 않다. 잘 그리지 못하면 영원히 그릴 줄 아는 것이 아니며, 그릴 줄 아는 것과 그릴 줄 모르는 것은 영원히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학습을 해야 하며, 배우는 내용을 잘 배워야 한다. 현재 성인이 어린이에게 그려주는 그런 종류의 그림일지라도 역시 현대파가 있은 후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며, 과거의 그림책(連環畫)도 어린이에게 보여주는 것인데, 과거의 그런 종류의 그림책도 전통적인 방법으로 그린 것이었다.

제자: 그렇다면 어린이 그들이 대법의 것을 표현하려고 하면, 그들이 직접 표현하면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면 반드시 학원파(學院派), 반드시 기술성이 있어야만 나타낼 수 있습니까?

사부: 아이는 그림 연습을 할 수 있으며, 연습그림을 성공적인 작품으로 간주할 수는 없지만, 아이들의 학교 미술수업 숙제를 학교에서 평가할 수는 있다. 명혜학교의 학생은 물론 법을 배울 것이며, 미술시간에는 반드시 대법과 수련생을 그리는 것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다만 공부와 숙제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학교의 미술수업에서 정식으로 학생들의 기본기를 배양하기를 희망한다. 사실상 기능이 없는데 그려낸 신은 신을 추(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비록 마음 씀씀이는 좋은 것일지라도 말이다. 다른 각도로 말하자면 신은 함부로 그리는 것이 아닌데, 그렇지 않은가? 그릴 줄을 모르는데 어떻게 신의 장중함(莊重)·아름다움(美好)과 바름(正)을 표현해 낼 수 있겠는가? 물론 수련생을 그리는 것은 제외된다.

명혜학교에서 학생들은 자신이 그림을 연습하고 싶으면 이것은 문제가 없으며, 잘 그린 것은 학교에서 스스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높은 수준의 작품은 반드시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특히 전시할 때는 정통적인 프로수준의 것을 내놓아야 한다.

제자: 그림 속에서 대법제자와 사부님께서 정법(正法)하신 장면을 체현(體現)하고자 하면 그려낸 것은 기타 공간의 불(佛)·도(道)·신(神)입니다. 구(舊) 우주의 모든 신은 정법(正法)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대법제자가 부동한 공간에서 정법(正法)에 참여한 부동한 심태의 체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까?

사부: 모든 신이 다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우주 중에서 다수 신은 참여하지 않았지만, 구세력을 제외한, 일부 완전히 사부의 요구에 따라 바른 면(正面)의 작용을 일으키는 신들이 있고, 그리고 또 천병천장(天兵天將)도 호법(護法)하고 있다. 모든 신이 다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바른 신(正神)은 참여하고 있다. 당신은 그릴 수 있다. 대법제자는 정념 중에서 신통(神通)과 공(功)을 움직일 수 있지만, 자신의 수련 잘된 신의 일면을 움직이기는 쉽지 않다.

제자: 대법제자가 기타 공간에서 정법(正法)에 참여하는데 그도 佛(불)·道(도)·神(신)의 형상인바, 역시 기타 佛(불)·道(도)·神(신)과 모두 같은 종류의 형상입니까?

사부: 형상은 그런 모습이다. 대법제자는 다만 속인 중에서 법을 실증(證實)하고 있으며, 그쪽은 기본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발정념(發正念) 중에서 그쪽의 능력을 움직일 수 있다. 법을 실증(證實)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두 이쪽의 주체(主體)가 하고 있으며, 정념(正念)이 강할 때에는 에너지와 법기(法器)·신통(神通)을 움직일(調動) 수 있으며, 보통은 이렇다.

제자: 그렇다면 다만 거기에 앉아만 있습니까?

사부: 왜냐하면 주체(主體)가 없을 때에 그것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체가 수련성취 된 후 주체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주체가 없는 상황에서 그가 스스로 움직인다면, 그 부분도 자신이 스스로 주인노릇을 하는(自主)것과 같지 않는가? 그럼 다른 한 생명이 된 것이 아닌가? 당신을 대신하고 되돌아와 조정한다면 그래서야 어떻게 되겠는가? 수련해낸 일체(一切)가 모두 당신이 아니라면 그건 안 된다. 그러므로 주체가 일체(一切)를 완성한 후에 한 몸(一體)으로 합쳐진다. 이렇게 말하자. 당신의 팔, 그것이 스스로 움직이고 통제할 수 없다면, 그것이 그래도 당신의 것인가? (뭇사람들이 웃음)

제자: 그쪽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일을 합니까?

사부: 진정하게 일을 하는 것은 바로 인간세상에서 법을 실증하는 당신들이며, 바로 당신이 여기에서 발정념(發正念)하고 당신이 진상(眞相)을 밝히고, 세인들을 구도하고 있는 것이다. 정념(正念)이 강하면 당신의 에너지를 움직일 수 있는데, 부동(不同)한 층차에는 모두 부동한 층차의 에너지·법기(法器)·공(功)이 있으며 정념이 강할수록 움직이는 능력도 더욱 크다. 또 어떤 수련생은 元神(왠선)이 빠져나와서 몸을 떠날 수 있는데, 정법(正法) 중에서도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元神(왠선)이 빠져나갈 수 있는 수련생들은 수련 잘된 그 일부분 신의 몸(神體)을 주재(主宰)할 수 있다.

제자: 불교 속의 그림은 아주 많은 경우가 불(佛)·도(道)·신(神)인데 참고할 수 있습니까?

사부: : 참고할 수 있다.

제자: 초서(草書)는 변이(變異)된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그림을 그린 후 그림에 간단히 써넣는 글은 반드시 해서(楷書)와 예서(隸書)로 써야 합니까?

사부: 초서(草書)는 사람의 바르지 못한(負) 일면을 방임(放任)하는 것과 사람의 관념(觀念)을 위주로 한 상태에서 쓴 것이다. 나는 단정하게 쓴 글자를 좋다고 느낀다. 글자도 신이 사람에게 전해준 것인데, 이렇게 하면 신에 대해서도 존경하는 것이다. 나는 다만 법리(法理)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은, 나는 초서만 좋아한다고 말하며 내가 연습한 것은 바로 초서라고 말하는데, 현재 나는 세인(世人)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법제자는 반드시 똑발라야(正) 한다.

제자: 사부님, 당신께서 돈황벽화(敦煌壁畫)에 대한 견해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사부: 고대에 거기는 원래 큰 사원(寺院)이었는데, 건축은 모두 전쟁과 오랫동안 수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가졌다. 돈황벽화는 바로 당대(唐代)를 전후하여 잇따라 그린 것이다. 그림 속의 어떤 것은 천상(天上)의 광경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교가 흥성한 시기에 그린 것으로 부처를 믿고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주 많았기 때문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부처의 광경, 신의 광경을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사람은 그것을 그려내었다. 그러나 또 동방의 회화기술이 성숙되지 못한 영향으로, 서방예술과 같은 투시(透視) 관계와 형체구조의 그런 성숙함, 그런 정확함이 없다. 그러나 1, 2천 년 전에 능히 이런 기술이 있었으므로 역시 중국의 불교와 예술발전으로 하여금 아주 길고 긴 문화의 광채를 나타내도록 하였다.

제자: 사부님, 저는 여쭙고 싶은데요. 기타 고대문명, 예를 들어 말하자면 이집트, 그리고 또 남아메리카의 마야문명 같은 것은 마치 우리가 인식한 불(佛)·도(道)·신(神)과 차이가 아주 큰 것 같은데, 그들은 존재한 적이 있습니까?

사부: 그런 문명들은 존재한 적이 있다. 그 사람들이 믿은 것은 부동(不同)한 신인데 많은 것이 모두 바른 신(正神)이다.

제자: 사부님, 천상(天上)의 신수(神獸)에 관하여, 동방의 것, 또 동방의 신, 그들의 법기(法器)는 대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습니까?

사부: 아, 당신은 마치 우주 중에 입자가 많은가를 물어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너무나 많고, 너무나 많다. 법기는 어느 신이든지 다 있으며 한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수련해 올라가는데, 법기는 사람의 수련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상(和尙)이 늘 사용하는 사발·염주·목탁, 도(道)의 총채(拂塵)·보검(寶劍) 등등, 모두 사람이 수련함에 따라 법기로 될 수 있다. 승려는 가지고 있는 염주를 날마다 굴리며 염불을 하는데, 그의 층차가 제고됨에 따라 손의 에너지도 커진다. 끊임없이 그것을 굴려 그 속의 에너지가 상당히 충실해지면, 염주의 본질에마저 변화가 발생하며, 장래에 수련성취하면 매 한 염주 알이 모두 법기가 되고, 전체 염주 또한 한 개의 법기가 되는데, 층차가 높은 이의 매 한 염주알 속에는 마치 한 개 세계처럼 무엇이든 다 있다. 각종각양의 물건이 모두 법기로 될 수 있다.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당신은 나는 법을 실증하는 글을 쓴다고 말하는데, 당신이 날마다 들고 있는 펜은 모두 공덕(功德)이 있는 것으로, 아마 당신의 펜은 장래에 모두 법기로 될 것이다. 수련인이 이용했던 물건은 일단 공덕이 있게 되면 모두 법기로 될 수 있는바, 당신들이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사용했던 화필(畫筆)도 포함된다.

제자: 사부님 저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조각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리스·로마, 그들의 그런 조각은 보기에는 아주 정확(精確)합니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 와서 중국 당대(唐代)의 불상을 보면 저는 오히려 아주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비례가 결코 사람의 신에 대한 공경(敬仰)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사부: 그렇다. 佛(불)·神(신)의 상(像)에는 佛(불)·神(신)의 법신(法身)이 있으므로 물론 일반적인 조각상과 다르다. 그러므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 내가 방금 전에 말한 것이 이 문제이다. 중국 사람은 사의(寫意)에 치중하며 서방인은 표면의 정확한 표현에 치중하는데, 두 가지 부동(不同)한 수법(手法)으로 모두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 동방 그림 중의 신은 사람을 감동하게 할 수 있는데, 표현한 것은 신이기 때문이다. 만약 속인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서방 그림 중의 신은 마찬가지로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러 보게(敬仰) 하는데, 그러나 서방 그림 중에서 표현한 것이 속인이라면 사람이 보아도 감동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중국 그림 중에서나 조각상 중의 기법(技法)이 서방과 같이 역시 성숙·정확하다면 더욱 사람을 감동시키고 더욱 진짜 같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신의 작용 때문에 성숙하지 않고 완벽하지 않은 작품이 됐다고 볼 수 없으며, 완벽한 작품에다 신을 더하면 그것이야말로 더욱 신성(神聖)한 것이다.

제자: 그래서 그 기교(技巧)를 취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사부: 나는 기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말한 것은 정통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데에 따라 그리되, 되도록 완벽한 예술이면, 이러면 자신에 대해서는 제고(提高)이며, 신에 대해서도 존경(敬重)이라는 것이다.

제자: (번역문)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저는 컴퓨터에서 설계를 하는데요, 자주 클로즈업을 취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대법제자나 속인을 클로즈업합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창작할 때 사람의 얼굴부분을 클로즈업할 수 있는지 등등인데, 좋지 않은 것인지, 표준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부: 괜찮은바, 클로즈업뿐만이 아니라 전체 사람도 모델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미적 표준이 있어야 하며, 사람의 관념상에서 좋다고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제자: 스승님, 중국의 수련생은 이 방면에서 능력이 우리보다 큽니다. 그들이 받은 훈련은 우리보다 좋은데, 그들이 일을 좀 할 수 없습니까? 바로 우리 중국의 수련생들은 마땅히 우리보다 잘 그린 대량의 좋은 작품이 있어야 합니다.

사부: 중국대륙의 수련생들은, 현재 우리는 기대하지 말자. 우리는 현재 중국대륙 이외의 각국에서 이 방면을 전공하는 대법제자들만 한다. 물론, 중국대륙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대법제자 천명을 찾으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으나, 현재 그곳은 사악한 박해가 발생하고 있다.

제자: 제가 여쭙고 싶은 문제는 현재의 영화·텔레비전에서도 회화(繪畫)가 있는데, 전통적인 회화와는 무슨 관계입니까?

사부: 무엇이든 그것에 대해 시대의 조류가 끼치는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아주 많은 만화영화에서 그린 그 형상은, 사실 내가 느끼기에는, 아주 추하며 일부 선(善)을 표현한 것도 선이 아니며, 형상만 놓고 말한다면 사실 아주 악(惡)하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말한 것은 바로 정념(正念)·선(善)·정통적인 방법(手法)으로 사람의 바른 길로 되돌아 걸어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대법제자는 미래의 세인(世人)에게 길을 개척해 주는 중에서 우선 예술 중의 정념(正念)을 되찾아야 한다.

제자: 사부님,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이 있는데, 회화창작과 음악창작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사부: 모두 정념(正念)으로 창작해야 하는바, 나는 방금 전에 음악창작을 하는 그들에게 말해줬는데, 방금 다 말했기에 여기에서는 말하지 않겠다. 그들에게도 몇 시간이나 말해 주었다.

제자: 스승님, 스승님이 말씀하신 선(善)을 저는 아주 큰 장면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부: 그럼 작은 제목으로 표현해도 아주 좋은바, 다 된다. 당신은 당신이 아주 작게 표현하고자 하며, 아주 큰 화면으로 하지 않고 아주 작은 화면으로 한다 해도 다 된다.

제자: 사부님, 천룡팔부(天龍八部) 호법(護法)은 어떤 형상입니까?

사부: 천룡팔부 호법은 석가모니가 말한 것인바, 그는 실제상에서 팔부중생(八部眾生)을 말한 것인데, 여덟 개 부분의 생명(生命)·생령(生靈)이다. 내가 당신들에게 안배한 것은 바로 천병천장(天兵天將)들이 호법(護法)하고 있으며, 또 용도 있는데, 이 두 부(部)이다. 물론, 개별적인 대법제자들은 또 개별적인 상황의 호법이 있다. 기타 부(部)의 호법은 모두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타의 그 몇 개 부의 중생은 모두 정법(正法)중에 있으며, 남을 수 있는지, 걸어 넘어올 수 있는지는 모두 정법(正法) 후에 봐야 하기 때문이다.

사부: 자네는 손을 몇 번이나 들었군.

제자: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대법이 다룰 소재(題材)는 아주 많다고 느끼며, 이 몇 년을 지나와 대법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하게 되었습니다.

사부: 그렇다.

제자: 그러므로 줄곧 아주 감동적이며, 우리 대법에서 다룰 소재(題材)가 지극히 풍부하고 감격적이며, 눈물겹다고 느낍니다. 대법제자 예술가들 우리는 이런 책임이 있으며,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완성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물론 느낀 것을 정말로 그리려고 할 때에는 역시 어려운 문제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 사부님께서 친히 설법(講解)을 해주셔서 우리는 아주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이미 방향을 잡은 것 같은 감각이 있습니다. 저는 구체적으로 문제 하나를 제출하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 그림전시를 조직하는 사람이 중대하게 다루어야 할 소재를 총체적으로 조금 조정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상(構思) 중에서 그려야 하는 소재가 아주 많으며, 또한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부: 당신이 말하는 협조(協調)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우리 어떤 사람은 생각을 더듬어 가는 길(思路)이 열렸으므로, 일부 밑그림(草圖)을 스케치하여 우리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 그리도록 하면 좋은바, 당신이 곧바로 구상(構思)할 필요가 없는데, 이렇게 해도 아주 좋다.

제자: 우리 어떤 대법제자들은 아주 좋은 구상(構思)이 있으며 또한 아주 좋은 생각도 있으나, 아주 좋은 기교(技巧)가 없습니다. 마치 대법제자가 하는 라디오방송국·텔레비전방송국처럼, 우리가 우리의 정보(信息)와 자료, 구상(構思)과 기교(技巧)를 공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중대한 소재(題材)의 품질(質量)을 보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대법제자가 처음으로 전시를 하는데, 진정하게 우리 대법제자의 수준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크고 작은 편폭의 작품은 다 좋으나, 너무나 큰 작품을 전시하기는 비교적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좋은 구상(構思)이 있고, 기교면에서도 일정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느끼지만, 저는 아주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혹은 어떻게 그리는지도 모르므로, 종합했으면 하는 느낌이 듭니다.

사부: 맞았다. 바로 이렇다. 당신들이 두 사람을 찾아서 구도(構圖)를 책임지게 하고, 가져와서 누가 그릴 수 있으면 그가 가져가서 그리게 하는데, 이렇게 되면 구상(構思)의 시간을 줄인다. 기본적인 초벌로 대체적인 구상(構思)이면 된다. 당신들은 모두 기교가 있기 때문에 능력이 있으며 할 수 있다. 내 생각에 이 생각은 아주 적극적이다.

나는 여기까지 말하기로 하겠다. 남은 일, 더 구체적인 것은 당신들이 잘 안배하면 된다. 어떻게 대법제자의 길을 걸어 나오는가 하는 것인데, 당신들이 오늘날 하는 어떤 일이든 모두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잘하면 인류들이 배울 것이고, 당신들이 잘하지 못해도 인류는 역시 배우게 될 것인바, 그러므로 대법제자는 반드시 잘해야 한다. 당신들이 한 것이 좋지 않고, 바르지 않은 작품은 내놓을 수 없는바, 인류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통적인 방법(手法)으로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좋은 것을 표현해야 하고, 선(善)한 것을 표현해야 하며, 대법을 찬양하고 신을 찬양하는 것을 표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신들은 기교면에서도 수준을 내놓아야 하며, 정통적인 수준을 내놓아야 한다.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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